친구들로부터
FRIENDSGIVING
윤원_RE:2024

“모두들 알면서도 사랑을 하지요”

안녕 주리. 경화님이 써주셨다는 “모두들 알면서도 사랑을 하지요”라는 주제를 받아들고서 2주 동안 이 문장을 입 안에서 굴려봤어요. 두 주 동안 저는 집에서 두 명의 친구들을 호스팅하고, 한 명의 사랑하는 친구에게 이메일을 썼고, 세 도시를 여행했어요. 글은 한 글자도 쓰지 않았고요. 8월 19일 밤에는 아라비아 산에 가서 올 해 처음 뜬 슈퍼문이라는 보름달을 보며 춤추고 기도하고 왔어요. 친구들을 위해 타로도 읽었고 지나간 사람들을 대중 없이 떠올렸고 달빛에 의지해 이름들도 써보았어요. 그러는 동안 이따금 알면서도, 사랑을 한다, 는 말을 떠올렸어요. 신기하게도 이 문장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모르게 되어요. 아는 것도, 사랑을 하는 것도, 알면서도 사랑을 하는 것은 더더욱 아리송해요. 어떤 날은 사랑에 대해 알만큼 안다고 생각했다가 다른 날은 사랑에 빠지려면 마음이 흔들리고 취약해진 나를 기다려야 하는데 이런 상태는 오로지 사랑에 대해 모를 때에만 오는 것이 아닌지 싶어지는 것이지요.

저는 사실 기다리는 것을 좋아해요. 그제 저녁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언제 사랑이 사랑인 줄 아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곧장 머리 속에 떠오른 것도 기다리는 것이었어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저는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이나 한 시간 먼저 도착해 만나기로 한 카페에 혼자 앉자 책을 읽고는 해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쓸데없는 메모를 끄적거리고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읽는 동안 약속 시간이 점점 가까워져요. 내가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는지도 모르고 저 유리문으로 들어설 사람을 상상해봐요. 두리번 거리며 제 얼굴을 찾아 자리에 앉을 때까지를 저는 모두 지켜보고 싶어요. 상대는 제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반쯤은 알고 반쯤은 모르겠지요. 제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생색을 내려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표현이라는 것을 상대가 알아들었으면 하고 반쯤은 바라고 또 반쯤은 내버려 두어요.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은 온전히 제 것이에요. 그 사람을 위해서 쓰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면 그만 기다릴 때가 되었다는 뜻이에요. 그럼 우리는 기다리지 않을 만큼만 즐거운 관계가 되어요.

다른 한편으로 저는 항상 기다리고 있어요. 가장 확실히 기다리는 것은 죽은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될 날이에요. 그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약간의 안도감이 느껴져요.

또 ‘진짜’ 사랑을 기다리고 있어요. 타로에는 행맨이라는 카드가 있는데요. 사람이 한 발만 묶여 공중에 거꾸로 매달린 형상의 카드에요. 제게 리딩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지금은 기다려야 하는 상태지만 마음만 먹으면 발목을 감싼 끈을 풀고 언제든 내려올 수 있는 카드이자 세상을 거꾸로 뒤집어 보는 카드라고 설명해요. 올 해 보름달 의식을 치르지 전까지 이 행맨 카드는 저를 계속 쫓아다녔어요. 제가 간신히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생각한 순간조차도 이 카드가 나와서 당혹스러웠던 적도 있어요. 새로 시작된 관계를 축하하기 위해 연인과 각자의 에너지를 읽었는데 저만 행맨이 나오는 식이지요. 당시에는 의아했었고 지금은 그럴 법했다고 느껴요. 지나고나니 그 사랑이 진짜가 아닌 듯 했거든요. 그보다도 덜 사랑한 다음 사람을 만나고 나니 어쩌면 진짜 사랑이었을 수도 있을까 다시 의심하고요….  

기다려본 것들과 기다린다고 감각하는 것들을 아무리 나열해도 기다림에는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한번은 제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이 기다림이 언제 끝나는지 너무 알고 싶어서 최면치료를 하는 친구에게 의뢰를 했어요. 최면술을 하러 친구네 집에 처음 갔어요. 제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찾기 어려운 고층 아파트였는데 창문에서 동네 공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였어요. 나무들이 브로콜리처럼 보이는 높이였어요. 높은 침대에 폭 파묻혀서 최면을 시작했는데 갑자기 발 밑이 꺼지면서 칠흑 같은 우주로 끝없이 떨어지는 공포를 느꼈어요. 제가 패닉하는 것을 보았는지 친구가 급히 저를 깨웠고 우리는 한동안 침묵 속에 누워있었어요. 저는 그 후로 딱 한 번 다시 최면을 시도했고, 두번째까지 실패한 이후로는 돌아가지 않았어요. 최면을 더 이상 받지 않기로 결정한 이후로는 제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아는 것을 체념하게 되었어요. 어떤 기다림들은 기다림이 끝난 후에야 무엇을 기다렸는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무엇인지 모를 것을 기다리고 있는 시간 동안의 취약함이 제게는 사랑일지도 모르겠어요.  

주리가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읽으며 주리가 알면서 하는 사랑과 모르며 하는 사랑을 추측해보게 되어요. 다음에 만났을 때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윤원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