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리 님, 오랜만이에요. 해가 지면 서점 문 앞에 빼꼼, 주리 님이 서 있을 것 같아요. 하루치 피로를 어깨에 메고 싱긋 웃는 얼굴 어른거리면, 다가서 톡톡 다독이고 싶어요. 저 어렴풋은 주리 님이 아닐 리 없죠. 몸은 지구 반대편에 있어도 여기 혜화동에 주리 님은 진짜 있어요.
‘자기만의 밖’은 수수께끼 같아요. 바로 생각난 모두 나의 안인 것 같고, 밖은 베일에 가려져 있겠다고요. 바깥은 상상 속에, 문득 스치는 갈망 속에, 꿈의 중얼거림 속에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한참… 그러고 보니. 지금 나의 일, 나의 집, 나의 벗. 나의 안을 이루는 것 모두 밖으로부터 온 것이네요. 이 색색의 것들이 언제 나의 안이 되었나, 아득해요.
있지요, 오래전에 많은 날을 방에서 보냈어요. 창문에 검정 색지를 덕지덕지 붙여놓은 방이었어요. 휴식을 위한 건 아니었고, 공포에 질린 것에 가까웠어요. 바깥이 있다는 공포. 내가 있다는 공포요. 잘 먹지 않았고, 잠들지 못했어요. 월경이 멈추고 한참 지나자 어떤 말이 맴돌았어요. 네 안에는 아무것도 둘 수 없어. 검은 방에서,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때 기억은 열 수 없는 상자 속에 있어요.
처음은 멍한 채 걸었어요. 동네를 걷고, 버스를 타고 모르는 곳으로 가, 걷고 또 걷고. 그리고 비행기를 기차를 타고 멀리, 더 멀리로 갔어요. 바깥일 수밖에 없도록, 쉽게 돌아가지 않도록요. 그런 동안 희한하고 꿈밖인 일들 많았는데, 나는 아무것도 담아두지 못했어요. 그리고 한 아이를 만났어요.
있잖아요,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난 그렇게 천연색을 띤 세상 처음 봤어요. 그 애는 말할 때 꼭 이름을 먼저 불렀어요. “경화,” 그리고 한 박자 쉬고 말을 이었죠. “가장 무서운 게 뭐예요?” 나는 그 애가 건넨 질문에 제대로 답해본 적이 없어요.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종내 아무 말 못하기까지 그 애는 이름을 부를 때와 같은 표정으로 있었어요. 함께 걸으면, 그 애가 보는 것을 내가 동시에 보고 있다는 사실이 좋았어요. 그 세상은 느릿하고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상상하고, 갈망하고, 꿈꾸었어요. 기쁘고 슬프고 간절한 것들을요.
이후에 나는 그 애로 인해 엄청난 눈물을 쏟게 돼요. 다시 방에 들어박히기도 했죠, 그런데 그때 기억은 참 선명해요. 슬프고, 화나는 동안 나는 무언가를 읽거나 듣고 받아 적으며 멈춰 있지 않았어요. 그렇게, 그리고 지금.
나의 안이 되어준 것들을 들여다봐요. 빛바랜 것과 지금의 것이 함께 있는. 언젠가 지금의 것도 빛바래겠지요. 나는 다음이 있다고 믿어요. 밖으로부터 나의 안이 될 것이 남아 있다고요. 출근길 버스에서 문득문득 스치는 것이 나를 그리로 데려다주겠지요. 그곳은, 조금 느려요.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있고요. 저녁의 식탁에는 수저가 여럿이에요. 우리는 막춤을 추는 서로를 보다가 가무러치기 일보 직전입니다.
주리 님, 주리 님께 이렇게 긴 말을 해본 건 처음이네요. 혼자 주절거리다 보니 이야기가 자꾸 샛길로 빠진 것 같아요. 응석을 부린 것도 같고.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어요? 혹시 미간을 찡그리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진 않지요? 주리 님, 우리 나중에 꼭 같이 춤춰요. 나는 정말 몸치예요. 웃게 만들어 줄게요. 약속을 꼭 받아내고 싶은, 경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