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떠나는 친구들에 대해 생각합니다. 자기만의 언어를 찾으러 혹은 버리러 친구들은 자꾸자꾸 떠나가고 저는 제 자리에 서서 그들을 배웅합니다. 대개는 정해진 시일 안에 돌아옵니다만 저는 그 짧은 시간조차 못내 서운해 하곤 합니다. 그렇게 조금씩 자리를 잡아 언젠가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아서. 혹은 돌아왔을 때, 제가 그들과 함께 변화하지 못해서 그들의 언어가, 생각이, 관심사가, 취향이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을까 봐.
사소한 불안입니다. 올해의 저는 정말 많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시간을 보냈습니다. 서로의 죽음을 걱정해서 실족사만은 피해달라고 농담을 건네는, 사랑하는 친구들. 사랑과 일과 미래와 나를 형성한 대화들. 45개의 회의록과 6개의 스터디 녹화 영상, 5편의 지원서와 2편의 결과보고서, 1년 반의 시간 안에 담기지 않는 대화들이 제 몸 속에 남아 있습니다. 무엇이 원래 제 것이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한데 뒤섞여 자라난 생각들은 계속해서 그런 모양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친구들과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영화보다 먼저 있었고 어떤 친구들은 영화와 함께 찾아왔습니다. 시놉시스를 완성했을 때 곧바로 공동작업을 기획한 이유는 시놉시스가 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 것이 아니라 제가 살아오며 경험한 것으로부터, 그런 경험을 준 사람들로부터, 그 사람들과 함께한 상호작용과 대화로부터 탄생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우선 가장 가까운 친구 둘에게 작업을 제안했고 그 두 사람이 각자에게 그러한 사람을 다시 한 명씩 데려왔습니다.
그런 식으로 불어난 친구들이 8명이 되었을 때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경력도 전공도 무관한 8명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이란 창조성과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이 그 발생부터 사회적이고 협동적이라는 데 동의한다는 점, 타인의 도움 없이 지금의 창조성과 능력을 얻지 못했을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는 점, 누군가와 그런 상호 도움의 관계 속에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유령) K가 죽었다. 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시놉시스가 회의에 회의를 거치면서 비가시성에 대해, 죽음과 애도에 대해, 배제와 누락에 대해, 돌봄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때로 친구들은 영화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더라도 자기가 본 것과 배운 것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횡단신체성’이라는 개념도 그 중 하나입니다. 문화인류학을 전공하는 주은이 말해준 것입니다만 자칭 모든 개념을 느낌으로만 아는 주은은 제가 글로 옮겨 적을 수 있을 만큼의 설명은 해 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는 주은과 개념까지는 아니더라도 느낌은 공유하기 때문에 제가 느낀 것 만큼을 또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습니다. 저와 느낌을 공유하는 또 다른 누군가는 이해시킬 수 있을 만큼이기를 바라면서.
주은은 횡단신체성이 바로 그런 개념일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정말 뉴런이라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감각이나 이해의 방식을 공유하는 것.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면서 서로의 몸에 침투하는 것. 나의 몸이 열려 있고, 열린 몸을 우리가 환경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통과하고 있고, 그것들이 다시 내 몸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 공간을, 친구를, 생각을 공유하면서 서로의 몸에 서로의 흔적을, 그러니까 서로의 삶에 있는 다른 이들이 남긴 흔적을 다시 서로에게 남기는 것. 파묘에서 각자의 기여도를 부러 측정하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 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신체가 열려 있고, 그 열린 몸들을 서로가 통과하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너와 나를 명확히 구분하는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나로부터 너가 변화하고, 너로부터 내가 변화하고, 몸 밖의 환경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나의 몸을 투과하는 것이요. 그렇게 우리가 얽히고 설켜 구분할 수 없이 오염되는 것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