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의 세계
원래 이 글은 지난 금요일에 송고해야 했는데, 수요일에 내가 나고 자란 나라의 원수가 비상계엄을 선포한 뒤 정신이 마비되었다. 써둔 원고에서 한 글자도 고치지 못한 채 계엄에 관련된 기사와 영상만을 탐독하고 소식을 나르고 번역하고 집회에 나간 가족과 친구들의 안부를 묻다가 마감일을 지났다. 그가 출국 금지된 오늘 비로소 깊이 잠을 자고 밥을 많이 먹은 뒤 다시 자고 일어나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전 글에서 ‘돌아갈 거야, 돌아갈 거야.’라는 구절을 썼다. 내가 호주에 오기 전 우리나라에서는 사고와 자살로 사람이 많이 죽었다. 산업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거리에서 축제를 벌이던 사람들이, 성소수자들이, 친구가 죽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역에서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게 연일 들려 나갔다. 어떤 죽음도 충분히 애도 되지 못하고,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에게 책임을 물을 시간 없이 새로운 죽음이 도착했다. 임계점이 채워지고 있었다. 친구가 죽었을 때, 내 죽음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살고 싶었다. 살아 있어야 글을 쓸 수 있었다. 도망치면서도 언젠가 돌아갈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제 돌아갈 곳이 없어질 수도 있는 거였다. 내가 도망쳐서, 싸우기를 포기해서 생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달 돌아가는 비행기 푯값은 내 전 재산에 맞먹었다. 창밖의 여름 하늘은 싱싱했고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호주에서 우리나라는 새삼 얼마나 먼 곳인지. 처음 호주에 왔을 때 햇살이 너무 밝고 공기는 맑아서 어색했던 일이 생각났다. 내가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학살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우리나라 일만큼 절절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처럼, 호주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상황 또한 미지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안타까운 일일 뿐이다. 위험과는 철저하게 유리된 것처럼 보이는 서방 세계. 그러나 호주에 와서 나는 몇 가지 일을 봤는데, 그중 한 가지는 여러 인종이 모여 사는 큰 도시의 쇼핑몰에서 대낮에 칼부림이 일어나 사람들이 죽은 사건이다. 가해자는 자신들의 신에게 약속받았다며 다른 땅에 사는 이들을 몰아내려 전쟁을 일으킨 나라의 국교를 가진 이였다. 쇼핑몰은 전쟁을 일으킨 나라와 전쟁이 일어난 나라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사는 두 개 구역의 중앙에 위치한다. 처음에 사람들은 감시 카메라에 포착된 그의 외모를 보고, 그의 피부가 어두운 것으로 판명했고, 그를 전쟁이 일어난 나라의 사람으로 오인했으며 이것을 혐오에 의한 테러로 명명했다. 그가 전쟁을 일으킨 나라의 사람이며 백인인데 다만 서핑을 많이 해서 피부가 어두워졌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 그가 얼마나 큰 아픔을 가지고 살았는지에 대해 그의 아버지가 하는 말을 들었고, 그는 정신병을 가졌기 때문에 사람들을 살해한, 준거 집단에서 예외인 사람으로 분리되었다. 두 번째는 이 땅의 원주민이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영국이 이 땅을 식민지로 삼은 뒤 백 년에 걸쳐 원주민의 아이들을 빼앗아 노예로 삼고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려 시도했다. 내가 살았던 호주의 북쪽 도시는 원래 원주민이 살 수 있는 특정 지역 가운데 하나여서 원주민이 많았다. 많은 원주민들이 약과 술에 취해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었고 백인들과 부유한 관광객이 현금을 건넸다.
예감한다. 내가 언제나 두 개의 세계에 발을 걸치고 살아갈 것을. 두 나라의 부조리를 볼 것이고 두 나라의 투쟁에 참여할 것이고 두 가지 언어로 생각하고 글을 쓸 것이다. 그것은 증폭되어 여러 나라와 여러 언어에 걸칠 것이다. 모든 것은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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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고 바람 불고 흐리고 눈 오는 날. 가끔은 천둥번개.
원래도 좋아했습니다.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공기에 물기가 스미면 바깥으로 뛰어나가 춤을 추고 싶었습니다. 눈이 오면 내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된 것 같았습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없어진 세상에서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해가 뜨지 않는 날을 왜 이렇게 좋아하게 되었을까. 중학교를 그만두던 날이 흐려서일까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던 고장에서 자라, 학교가 쉴 때 이글루를 만들어서일까요. 태풍과 폭우와 폭설에 갇혀 안락한 곳에 고립되는 상상을, 사는 게 힘들 때 했습니다. 뜨거운 햇볕 아래, 숨을 곳 없는 도로를 따라 일터로 향하는 버스를 타려고 걸을 때. 넉 달 동안 세 번 소나기 내린 게 다인 호주 북쪽의 도시에서 일곱 달을 살던 때. 돌아갈 거야, 돌아갈 거야. 돌아갈 곳이 시간 속으로 사라진 것도 잊은 채. 날이 흐린 곳으로 돌아가면 내 인생을 스스로 굴려가야 하는 지겨움으로부터, 매일 먹어야 하고 씻고 자고 청소해야 하는 일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면 그날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될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경험은 삶을 풍부하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해보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어떤 경험은 안 해도 되지 않았을까? 최근에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게 상처를 남긴 경험. 나를 죽이지 않았고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굴렸고 결국 나를 성장시켰다고 하지만. 동시에 나를 아프게 했고 흉터를 남겼고 지난 삶에서 가졌던 믿음을 버리게 했습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른 곳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일까요. 긴 여름을 건너온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호주 북쪽 도시에서 나는 많이 걸었습니다. 뜨거운 햇볕 아래 많이 걸어 다니고 정류장에 앉아서 언제 올지 모를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렸습니다. 원주민들이 내 곁에 앉아 더위를 함께 견뎠습니다. 내가 맨 배낭 안에는 도서관에서 인쇄해 온 이력서 스무 장이 들어있었습니다. 나는 일을 구해야 했습니다. 호주에서 지낼 수 있는 첫 번째 비자가 끝나가서, 두 번째 비자를 얻기 위해서는 특정한 지역에서 특정한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 도시는 건기와 우기만이 존재하는 아열대 기후에, 유명하고 큰 도시들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건설업, 관광업과 요식업이 아니고서는 일자리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민자를 끌어모으기 위해 비자를 잘 주기로 유명해서, 사람들이 비자를 획득하러 건기에 몰려왔다가 우기가 되면 썰물처럼 빠져나가곤 했습니다.
도시에 도착한 지 3주 만에 첫 일자리를 구했는데 호스텔에 도착한 첫날 만난 어떤 백인 노인이 소개해 주었습니다. 처음에 노인은 자신의 자동차 대여 업체에 나를 채용하고 숙소를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했습니다. 사업장을 둘러보기로 한 날 아침 그는 BMW를 몰고 나를 태우러 왔습니다. 창고와 자동차와 요트와 지게차와 아직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사무실, 가구가 잘 구비된 숙소를 보여주었습니다. 차를 타고 인근의 부자 동네를 둘러보며 자신이 이전에 살았던 저택을 소개했습니다. 박물관에 데리고 가서 오십 년 전 이 도시에 상륙한 끔찍한 태풍 이야기를 실감 나게 해주었습니다. 다시 호스텔로 데려다주며 함께 요트를 타고 게를 잡으러 가자고 했지만 나는 그와 더 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출근하기로 약속되었던 날 아침 이른 시각에 그는 갑자기 사무실 전기선에 불이 나서 한동안 사업을 운영할 수 없게 되었다며 모든 것을 취소했습니다. 나로서도 미심쩍은 마음에 친구에게 내 짐 일부를 가지고 숙소에 방문해달라고 부탁한 상태였기에 잘된 일이었지만, 실망감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일주일 뒤, 호스텔 앞에서 다시 노인을 만나게 되어 그가 소개한 호텔을 첫 직장으로 가지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내게 일을 잘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고는 내가 자신이 팔을 잃지 않았더라면 꿈꾸었을 법한 여자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되묻자, 그는 내가 호주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며 둘러대었습니다. 며칠 뒤 나는 호텔에서 해고되었습니다. 그 호텔은 지금까지 일주일 일한 분의 세금 증명서를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많은 가게에 똑같은 질문을 하며 다시 오랫동안 걸어 다녔습니다. 어떤 날은 호스텔에 누워 온라인으로 서류 지원을 했고 어떤 날은 아주 늦잠을 잤습니다. 호스텔에서 만난 친구들과 어울려 새벽까지 놀기도 했습니다. 낯선 사람을 많이 만났고,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나는 아시아에서 온 젊고 체구가 작은 여자로 가장 먼저 분류된다는 점을 깨우쳤습니다.
어느덧 네 개의 직장에 다니게 된 나는 그중 두 개를 친구들에게 나누어줄 예정이었습니다. 두 번째 비자의 승인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울증을 녹인다는 호주의 햇살을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에 신물이 났고, 일하는 데 필요한 것을 요구해도 내 말을 자르거나 들어주지 않고 일에 대해 늘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는 백인 매니저에게 화가 났습니다. 내가 일하는 카페는 한적한 편이고 화려한 라테 아트 기술을 필요하지 않아서, 일은 어렵지 않고 임금도 높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힘을 많이 쓴 상태였습니다. 사랑하는 것들에서 멀리 떨어져, 큰 의미나 효용을 알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정류장에서 술을 마시거나 약에 취한 사람들, 버스에서 싸우고 소리지르는 사람들을 매일 같이 보며 출퇴근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원주민이었고, 나는 그들이 겪는 어려움이 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 그들이 미웠습니다. 한국에서 나를 위협하던 요인들로부터 분명 잘 도망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기력이 없었습니다. 구직을 하고 집을 구하고 친구를 만들고 이곳의 땅과 바다와 햇볕에 적응하느라 쇠약해져 있었고 미미한 적대감조차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호주가 백인이 아닌 이, 영어를 서툴게 구사하는 이 그리고 원주민을 착취하고 소외시킴으로 굴러가는 나라라는 확신은 나날이 두터워졌습니다.
북쪽 도시를 떠나기 전에 우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일 끝나고 나오는 길 갑작스레 비가 내렸고 나는 우산을 빌리러 직장으로 돌아갈까 하다 매니저와 마주치기 싫어 버스정류장까지 달리기로 했습니다. 빗속으로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촘촘하고 억센 비가 쏟아졌습니다. 눈을 감은 채 버스 정류장으로 뛰면서 나는, 이제 떠날 수 있다,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북쪽 도시를 떠올리면 이상합니다. 아무도 나에게 그 모험을 완수하라고 요청한 이 없습니다. 오히려 친구들과 가족들은 내 상태를 걱정하며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두 번째 비자를 획득하고도 몇 달을 더 견뎠습니다. 잃어버린 물건과 사람, 생각은 많고 마음속에 굳은 심지가 하나 생겼는데 이것이 내 인생에서 무슨 역할을 할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간 일어난 일이, 그 도시의 외곽에 위치한 어떤 버스정류장에 앉아, 한낮의 아스팔트 위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바라보며 한 상상 같습니다. 이곳 말고 다른 곳이 있던가? 여기가 세상의 전부는 아닐까? 몽롱한 채로 질문했습니다. 서울에는 눈이 내렸다는데 영원히 그곳에 도달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나는 몇 주 전 호주 전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동쪽의 도시로 왔습니다. 이곳은 여름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쨍한 햇살이 거리를 비추고, 야자수와 침엽수가 함께 자랍니다. 어릴 때 지었던 이글루는 녹아 사라졌습니다. 같은 겨울을 맞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완전히 달라진 세계에서 나는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