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리에게
'주리에게'로 시작했지만 읽는 사람이 주리만은 아닐 것 같아. 이 편지는 웹과 책을 통해 공개가 될 걸 알고 있어. 그래서 '주리에게'로 시작했지만, 주리는 대표 수신자이고 숨은 참조 목록을 열면 내가 알거나 혹은 모르는 사람들이 주르룩 나올 것 같은 느낌이야. 누군지 다 알 수는 없겠지만. 나는 그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이 글을 시작하고 있어.
이 편지를 다른 사람들도 함께 읽는다 생각하니까 이 편지를 통해 가장 하고 싶은 게 생각났어. 주리에 대한 나의 사랑을 보여주는 거야. 왜 수신자가 아니라 참조 목록에 끼어서 메일을 받으면 '아 나는 그냥 참고하면 되는 거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잖아? 그래서 이걸 어쩌다 읽게 된 사람들이 주리에 대한 나의 사랑을 참고해서 열심히 사랑을 찾으면 좋겠어. 그게 지금 이 편지를 쓰는 나의 욕망이야. 더군다나 '자기만의 밖'이라는 주리가 선정한 주제에 대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친구였단 말이야. 그래서 이건 내 친구 주리에 대한 사랑 편지야.
자기만의 밖이라는 주제를 듣고, 당연하게도 안을 생각해보게 되잖아. 그런데 나는 나의 안을 생각하면 내장기관과 쉴 새 없이 흐르는 혈액과 건강 채널에 종종 나오는 떠다니는 적혈구 애니메이션, 그리고 요즘따라 자주 아픈 내 눈알 같은 게 가장 먼저 생각나. 그러니까 나의 마음이라든지, 기억이라든지 이런 것보다 내 몸을 갈랐을 때 눈앞에 보일 것 같은 기관들이 먼저 생각나. 나만의 안 같은 건 그냥 피와 근육과 지방과 그런 것들이야. 그냥 온전히 나만의 안이라면 말이야. 나에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나의 안은 그런 모습이야. 주리가 진화님과 주고받은 편지를 읽어보면서 주리와 진화님에게는 나에게는 없는 안이 있다는 걸 알았어.
난 나만의 밖을 생각하면 친구들이 생각나. 친구들의 내장기관을 상상하는 건 아니야. 주리의 내장이 건강하길 바라긴 해. 어쨌든 그냥 나만의 밖이라면 아무래도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이야. 얼마 전에 우연히 그런 걸 봤어. 비혼 여성 공동체에 관한 글이었던 것 같아. 거기에 어떤 댓글 내용이 뭐였냐면, '나이 들어 봐라, 가족 없이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냐?'는 거야. 그 댓글을 쓴 사람은 가족과 아주 사이가 좋거나, 대단한 우정을 경험해보지 못했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주리야. '세상'이라는 의미로 '밖'이라는 단어를 고른 거라면, 내가 이 편지의 주제로 우정을 고른 것도 잘한 일인 것 같아.
내가 마음이 닳도록 좋아하는 친구가 둘씩이나 올해 미국으로 떠났어. 사실 너희를 하루도 빠짐없이 생각해. 너희가 오늘은 어떤 책을 읽을지(책 안 읽는 날도 있다는 건 알아), 무엇을 먹으며 어떤 사람들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 궁금해. 이런 자리에서 쓰기는 조금 부끄럽지만 조바심이기도 해. 우리가 어떤 물줄기를 타고 가까워졌다가 다른 생활들이 축적되어 물줄기의 방향이 틀어지고 결국 우리가 서로 닿았던 흔적마저 없이 멀어지는 일을 평생 반복해왔잖아. 그런 반복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잘 모르겠거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야겠어.
아무튼 주리를 보러 뉴욕으로 얼마 전에 잠깐 여행 갔을 때 말이야. 그리고 그곳에서 윤원이까지 만나서 우리 셋이 함께 놀았던 때 있잖아. 어떻게 이렇게까지 사는 게 재밌나 싶었어. 여행을 다녀와서 통장 잔고가 0을 지나 마이너스의 영역으로 무한정 깊어지고 있지만, 열심히 또 나의 노동을 팔아 너희를 보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즐거웠어. 내가 친구들을 이렇게 좋아하는 건 굉장히 자기중심적인 이유 때문인데, 내가 정말 너희들 덕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야. 친구들을 내 삶의 중심에 놓은 건 고작 2, 3년 사이의 일인 것 같아. 주리의 영향도 정말 커. 사람들과 무난하고 평화롭게 섞여서 살아가고자 하는 능력과 의욕이 현저히 떨어지는 내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꽤 재미나게 살아가고 있는 건 친구들이 사는 법을 알려줘서야. 주리 같은 친구들이. 주리는 좋아하는 마음을 정말 잘 표현하는 사람이잖아. 아무런 의심 없이 주리가 나를 아껴준다는 걸 믿을 수 있었어.(나 지금 편지 쓰면서 울고 있음)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 의심 없이 그 마음을 다 수용할 수 있는 건 정말 드문 일이라고 생각해. 나는 아마 서른이 넘어서야 그런 걸 경험해본 게 아닌가 싶어.(이제 사회화 과정이 시작되는 걸까..? 인생이 참 길다) 우리는 오랫동안 말도 놓지 않고 깍듯이 예의 차리며 만났지만 그러면서도 주리를 만나면 으앙으앙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 그러니까 으앙으앙이 뭐냐면.. 아무튼 편한 마음으로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을 표현할 수 있었어. 나는 그런 걸 잘 못하는 사람인데, 그런 걸 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정말 고맙다고 생각해. 주리 앞에서는 그럴 수 있으니까 주리를 만나는 게 신나고 편안해.
주리야. 편지를 쓰고 있으니까 너의 오물오물하는 입이 보고 싶어. 먹을 때도, 말을 할 때도 주리의 입은 오물오물하는 편인 것 같아. 그게 너무 귀여워!!!!!
그리고 종종 붉어지는 눈을 사랑해. 내가 아끼는 친구들은 다 허벌눈물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유유상종이래잖니.
주리야. 나의 밖이 되어줘서 고마워. 나도 너에게 튼튼한 밖이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을까?'말고 '될 거야!'로 마쳐야겠다.
튼튼한 밖이 될 거야!
추운 뉴욕에서 새로 산 패딩이 부디 따뜻하길 바라며
보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