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리에게,
모처럼 긴 가을을 보낸 것 같아. 올 가을은 더디게 와서, 언제 이파리 색이 바뀌나 궁금한 마음으로 나무를 올려다보곤 했어. 정신차려 보니 발밑에 낙엽이 수북해서 가을이 온 줄도 모르는 사이 벌써 끝나가는 걸 알았지.
낙엽을 보면 우리집 개가 생각 나. 나의 개는 낙엽이 두툼하게 떨어진 길가에서 낙엽에 파묻혀 걷는 걸 참 좋아했거든. 알록달록한 낙엽 더미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하얀 귀, 사부작 사부작 걸을 때 소리, 푸다다닥 몸을 털고 나와서 만족스러운 듯 나를 올려다보던 까만 눈동자, 그런 것들이 생각 나. 나의 리치는 이제 낙엽을 봐도 신나서 달려가지 않고 산책 나가면 집에서 멀어지는 걸 걱정하는 나이 든 개가 됐다.
알면서도 하는 사랑을 생각했을 때 나는 단번에 리치를 떠올렸어. 난 리치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데 나의 개가 늙어 간다는 걸, 우리의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어서. 리치가 없는 시간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얘를 매일 더 사랑하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는 건 알아. 리치가 늙어가는 시간을 기록하고 기억하며 사랑하고 있어.
내가 스코틀랜드에서 동물복지를 공부할 때, 정말 많은 동물들을 봤는데도 눈물은 안 났거든. 리치와 같은 단두종을 온종일 배운 날이 있었어. 단두종 개들은 호흡하기 어려운 신체 구조라서 언제나 ‘의식적으로 숨을 쉰다’(consciously breathing)고 하더라. 얼굴을 어디 올려놓고 있어야 그나마 편안함을 느낀대. 리치가 내 발 위에, 팔 위에 얼굴을 얹고 자던 모습이 생각나서 막 울었다. 곧장 엄마한테 전화해서 리치 잘 있냐고 물었는데 엄마 목소리 너머로 리치 숨소리가 들렸어. 숨을 쉬고 있구나, 안도감도 들고 안쓰럽고 미안하고 나는 이 모든 감정을 다 안고 너를 더 많이 사랑할게 다짐했어.
리치의 가을이 아주 길었으면 좋겠다. 나는 가을을 참 좋아해. 겨울이 오는 걸 알면서도 가을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얘기한 시인을 우리 같이 배웠지. 기억나? 그때 우린 다 조금씩 울었어. “봄의 노래들은 어디 있나요? 아, 그들은 어디 있나요? 그들을 생각하지 말아요. 당신도 당신의 음악이 있으니까.” 알고 있기 때문에 가을을 참 좋아해.
리치는 건강히 잘 있어. 주리 잘 지내?
노란 가을나무 아래 노란 옷을 입고 있던 주리, 보고싶다. 우리 따뜻한 겨울을 맞자.
사랑을 담아
진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