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노래에 대한 일종의 주석
어떠한 멜로 영화를 보아도 눈물이 나지 않게 된 지 오래다. 사랑을 믿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 이제는 지루한 주제가 된 남녀 간의 사랑이든, 최근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퀴어한 사랑 이야기든, 미디어에서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사랑의 관념은 내겐 너무 추상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픽셀 재질의 그 생산품을 두개골과 갈비뼈 사이에 보석처럼 끼워 넣고선 자기도 그런 사랑을 하고자 바라고 기대하고 요구하고 그러다 실망하고 토라지는 집단의 광기를 나는 가끔 본다. 세상에 사랑 비스무리한 것이 있다면 보석이 아니라 엄청나게 찐득하고 시커먼, 니코틴으로 뒤덮인 폐 조직같이 더럽고 불결한 것일 텐데. 결코 아름다울 수 없을 텐데. 점성 높은 체액을 왈칵왈칵 흐느끼는 덩어리진 몸들 사이에 단단한 결정의 자리는 없을 텐데.
잠깐 글이 샜다. 이 글은 눈물에 대한 이야기다. 멜로물에 도통 반응이 없는 내 안면 근육은 엄마 이야기 앞에서 무장해제된다. 소위 말하는 예술 영화든 상업 영화든 장르는 상관이 없다.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 눈물을 살 이유는 없다. 최근 몇 년간 또 눈물값이 꽤나 올라 영화를 고르는데 깐깐해졌다. 영화관에서 볼 영화를 고르는 제1원칙, 포스터에 엄마 역할로 분한 배우나 엄마 관련 텍스트가 잠깐이라도 보이면 후보에서 제외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나리』는 아직까지 보지 않았고—앞으로도 보지 않을 것 같고—다른 의미에서 『마더』를 보지 않았으며, 20대 초반 당시 만나던 연인과 보았던 『건축학개론』에서는 기습을 당했고, 『신과 함께』 1편에서는 엄청난 반전 때문에 눈이 퉁퉁 부었다. 그냥 저승 액션 무비인 줄 알았는데, 군복 입은 아들과 어머니의 꿈속 재회는 반칙 아닌가? 한국 신파의 공식이자 가장 쉽고 게으른 해답이라고 내 머리는 실시간으로 나 자신을 달랬지만 몸은 언제나 그렇듯 배신한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나, 무슨 방학 과제를 하다가 방에서 갑자기 울음이 터진 기억이 난다. 그때 하필 엄마가 들어왔고 내 얼굴을 보더니 당연히 놀라서 이유를 캐물었다. 과제는 가족, 어쩌면 구체적으로 엄마에 대한 것이었는데, 과제를 하다가 그동안 엄마에게 잘못한 일이 많았던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자 괜스레 눈물이 났다. 딱히 구체적으로 뭘 잘못했는지 떠오르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냥 막연하게 죄스러운 생각으로 가득했다. 사춘기가 막 올 시절. 엄마도 울었고, 나도 겨우 울음을 그치는 데 오래 걸렸다.
엄마에 관한 영화든, 드라마든, 어떤 이야기의 형식을 갖춘 뭐든 간에 엄마에 관한 것이라면 내 몸은 자동으로 반응한다. 그리고 난 내 의사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이 몸의 격동(격통)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기 직전, 그러니까 불과 약 세 달 전에 엄마와 아빠가 함께 『미나리』를 보자고 하셨다. 올레 티비에서 구입하셨다는데, 나는 차마 같이 보지 못했다. 부모님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매정하게 거절한 것도 아닌데, 그냥 “그래요” 하고는 조용히 방에 있었을 뿐인데, 지금 와서 후회되는 건 왜일지. 그래도 여전히 두려운 건 매한가지다.
내 두뇌의 작용과 관련 없이 왈칵 쏟아지는 눈물은 문학 비평을 공부하는 내겐 또 다른 분석의 대상이다. 우리가 인식하거나 언어화하지 못하는 차원의 층위가 우리 몸의 주요한 용적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상상은 물론 나만의 것이 아니다. 프로이트부터 시작해 최근 뇌과학을 비롯한 생물학을 수용하고 있는 이론가들에 이르기까지 정신분석은 항상 이 질문을 중심으로 우리의 정신과 몸을 해석해 왔다. 내가 정신분석에 끌리는 이유도, 언어화할 수 없는 소리/음악의 의미 값에 끌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실 듣기 어렵거나 신경을 잘 쓰지 않을 뿐이지, 우리 몸은 소리로 가득 차 있다. 고요한 밤에 자려고 누우면 들리는 심장의 박동, 운동을 격하게 하고 나면 거칠어지는 숨소리, 배고플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꼬르륵 소리. 몸에 고장이 나면 소리가 달라진다. 청진기의 음성학. 내 눈물샘에선 어떤 소리가 날까. 불쾌하게 찔꺽거리려나.
때론 내 눈물샘이 독자적인 사유와 감각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자문한다. 『창자 페미니즘』(Gut Feminism)의 저자 엘리자베스 윌슨은 두뇌가 아닌 ‘주변부’에 있는 신체 부위들, 그러니까 손과 발부터 해서 위나 창자 같은 ‘부속’ 내장 기관들이 때로는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외부 자극에 반응한다고 말한다. 매혹적인 이론이다.
그럼 “엄마를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는 명제는 어떻게 되는가. 이 너무나도 간단해 보이는 행동주의스러운 명제에 내 눈물샘이 낄 자리는 어디에 있나. 내 두뇌의 명령을 받지 않고 자기가 알아서 체액을 짜내는 내 눈물샘. 엄마에 대한 나의 기억은 다 이 샘에서 솟아 나오는 걸까. 그래서 결코 건조해질 수 없는 기억이 되고. 언제나 촉촉할 수밖에 없다면 또 얼마나 슬픈 일일까. 언젠간 말라버리려나. 말라도 허여멀건 소금 자국은 거기 그대로 있을 텐데. 너무 짜서 마셔버릴 수도 없다면, 그냥 거기 두는 게 최선일까.
마르지 않는 조그만 짠 웅덩이에 고인 엄마에 대한 기억들. 만 30세에 느즈막하게 결혼한 우리 엄마는 바로 나를 가졌고, 그래서 나와는 딱 30년의 터울을 두고 함께 늙어간다. 앞으로 우리에게 그만큼의 시간이 주어질까. 나는 지난 30년을 다 기억하지 못하는데, 엄마는 나를 위해 배를 가른 순간부터 나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쌓아 왔을까. 나에 대한 엄마의 기억은 어디에 저장되어 있을까. 눈물샘인가, 아니면 배에 남은 흉터인가. 내가 발생한 지점을 잔인하리만큼 정확히 표시하는 그 흉터를 나는 언제나 무서워했다. 내가 저기에 있었어. 엄마 몸의 일부가 되어서. 엄마의 내장과 뒤섞여서, 엄마의 창자를 짓누르면서. 엄마의 창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미웠을까. 글러먹은 놈이라고. 쯔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