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피비언니에게:
엄마들에 대하여
세 번째 편지

언니, 

답장 고마워. 올해 언니네 여름도 예년과 다르구나. 지난 편지에 비 얘기를 쓴 것이 민망할 정도로 언니에게 편지를 보내고 나서부터 한국에는 비가 오지 않았어. 지난 몇 주간 피부가 타들어갈 듯 더워서 나도 그새 비를 그리워하고 있었지 뭐야. 그런데 참 신기하지. 지금 막 긴급 문자를 받았어. 호우주의보. 창 너머 하늘을 보니 정말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아. 이 편지가 시원한 빗줄기와 함께 언니 메일함에 도착하길 바라며.   

특별한 달 특별한 사람을 소개해줘서 고마워. 언니 답장을 받은 날 밤, 나도 어릴 때 나를 돌봐주셨던 할머니 생각을 했어. 혹시 7월 25일 즈음마다 하는 특별한 의식이 있을까? 우리 가족은 가톨릭이라 할머니 기일이면 위령 미사를 올려. 크리스마스랑 부활절에만 성당을 나가는 나는, 할머니 기일 즈음이 되면 가끔 하늘을 봐. 하늘을 보면서 비 냄새가 나는지 킁킁대. 할머니 돌아가신 날 비가 많이 내렸거든. 

어릴 때 할머니와 놀면 또래와 노는 건 좀 시시하지 않아? 할머니는 수다 경력이 어마어마하잖아. 이제 말을 배우기 시작한 또래와 비교할 수 없지. 생선을 먹으면 헤엄을 더 잘 칠 수 있다니. 능청스러운 언니 할머니의 말이 난 정말 좋고 또 믿고 싶어. 나는 생선 귀신*인데, 수영은 못해서 말이야. 오늘 저녁은 고등어 구이 먹어야겠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발차기 연습을 해야겠어. 

어릴 때는 수영을 잘 못하는 게 조금 큰 일처럼 느껴졌어. 우리 엄마는 한때 수영 선수이자 코치였거든. 엄마는 내 힘없는 발차기가 만들어내는 물거품에서 조그마한 가능성이라도 보려고 했지만, 물이 겁나는 건 어쩔 수 없었어. 그래도 엄마랑 물속에 있는 건 좋았어. 엄마가 몸풀기 놀이로 수영장 바닥에 바둑돌을 뿌리곤 했거든. 하얗고 까만 바둑돌 열 개. 제한 시간 내에 잠수해서 하나씩 건져 올리는 놀이야. 내가 다 찾고 나면 엄마는 환하게 웃었어. 까만 수영모와 수경을 낀 채로 외계인같이. 

언니 말처럼 내가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수다를 떨 때 엄마라는 키워드에 자주 꽂히는 건 엄마를 더 이해하고 싶어서라고 생각해. 내 머릿속에도 엄마로 가득 찬 도서관이 있어. 물속에 뿌려진 바둑알의 모양으로. 잠수해서 하나씩 길어 올리고 있어. 그런데 길어 올릴 때마다 조금씩 명확해지는 건, 내가 어떻게 하든 엄마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을 거라는 것.  사실 내가 이해하고 싶은 것이 엄마가 아니라는 것. 나는 늘 엄마가 아니라 내가 엄마와 맺어온 관계에 집착한다는 것.

나는 올해 초부터 내 또래 한국 작가들이 엄마에 관해 쓴 글을 모으고 있어.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는 이슬아가 출판한 만화/에세이인데, 작가의 말을 이렇게 시작해. 

“우리는 서로를 선택할 수 없었다. / 태어나보니 제일 가까이에 복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몹시 너그럽고 다정하여서 나는 유년기 내내 실컷 웃고 울었다.” (p4) 

작가가 엄마를 바라보는 시선이 무척 다정하여서 다음 페이지부터 ‘내가 아는 다정한 이야기’가 펼쳐질 거라 생각하고 넘겼다 깜짝 놀랐어. 가톨릭-유교걸인 나는 엄마와의 다정한 순간들에 대해 생각은 해도 엄마의 몸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 그런데 이 작가는 엄마의 몸이 얼마나 야한지, 아빠와 어떤 섹스를 했을지, 다른 남성들에게 어떤 시선을 받는지 그런 이야기들을 해. 자기 몸과 엄마의 몸을 나란히 그리고, 자신의 신체적 고민과 엄마에게 도움받은 경험을 그려. 생각해보면 그래. 내가 엄마가 맺어온 역사도 모두 살갗을 부딪히며 쌓인 것인데 나는 왜 항상 몸을 뒤로 미루어 놓았을까. 

여기까지 쓰고 옷장 앞에 한참 서있었어. 내가 가진 몇 벌의 옷은 엄마의 것이야. 노란 맨투맨과 긴 청 재킷. 엄마가 대학 시절에 입었던 옷이래. 엄마는 내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당신 사이즈와 내가 꼭 같아서 옷 사기 편하다며 좋아했지만, 사실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나는 엄마보다 조금 더 키가 크고 통통해. 엄마는 항상 ‘우리’가 함께 입을 옷을 사왔지만 그 옷은 항상 내겐 조금 작고 엄마에게는 조금 컸지. ‘우리’에 우리를 맞추는 나날이 이어졌어. 그러고 보니 나와 엄마는 서로의 사이즈를 모르는 채 함께 자랐다는 생각이 드네.

*한국에서는 무언가를 너무 좋아하면 귀신이 된다고 해. 예를 들면 사과 귀신, 뽀뽀 귀신 등이 있어. 

주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