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리 그리고 진화에게
『자기만의 방』을 다시 읽고 울프가 방/밖, 자타, 남녀의 경계를 해체하는 양상에 대해 깊은 사유를 펼칠 줄 알았건만, 1장만 겨우 읽고 노트북 앞에 앉았어. 그래도 소득이 없는 건 아니야. 『자기만의 방』 하면 으레 떠올리는 주디스 셰익스피어나 “양성적 마음”(androgynous mind)은 아니지만(당연하지, 1장까지밖에 못 읽었으니까) 맹크스 고양이에 대한 멋진 대목을 찾았거든. 울프는(정확히는 울프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실체가 없는 ‘나’는) 옥스브리지 오찬에서 가자미와 자고새를 배불리 먹고 창밖으로 담뱃재를 털다가 꼬리 없는 맹크스 고양이를 봐.
저 갑자기 나타난 꼬리 잘린 고양이가 대학 안뜰을 살그머니 걸어가는 광경은 . . . 내 감정의 빛깔을 바꿔놓았다. 마치 누가 빛 가리개를 씌운 것만 같았다. 어쩌면 술이 깨고 있는 걸지도. 분명, 맹크스 고양이가 마치 자신도 우주를 탐구하기라도 하듯 잔디 중앙에 멈춰 선 것을 보고 있자니, 무언가 부족해 보였고 무언가 달라 보였다.
The sight of that abrupt and truncated animal padding softly across the quadrangle changed . . . the emotional light for me. It was as if some one had let fall a shade. Perhaps the excellent hock was relinquishing its hold. Certainly, as I watched the Manx cat pause in the middle of the lawn as if it too questioned the universe, something seemed lacking, something seemed different.
술이 깨고 있다고 의역한 구절에서 “hock”은 와인을 의미하는데 족발(얼추 그 부위)이란 뜻도 있어서, 처음엔 울프의 마음속에서 고기맛의 여운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생생히 살아있는 고양이의 존재가 들어서는 모습을 상상했어. 순전히 내 착각으로 밝혀졌지만. 다만 이 “퀴어한 동물”(queer animal)이 (동물권에 대해서는 아닐지라도) 울프의 사유를 촉발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여. 울프는 왜 맹크스 고양이를 『자기만의 방』 안으로 불러들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적어도 내게는 분명치 않은데, 쉽사리 설명되지 않는 만큼 고양이의 존재가 강렬히 유령처럼 텍스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아.
맹크스 고양이가 나를 사로잡은 건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읽은 영향이 클 거야. 편지를 읽기 전의 나라면 그런 디테일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겠지. 둘 사이에 오간 편지를 번역하면서, 나는 한국어와 영어 두 언어를 넘나드는 일을 넘어 두 사람의 언어 바깥에 있으면서 동시에 안으로 들어가는 멋진 경험을 했어. 어느 순간엔 둘의 대화를 엿듣는 제3자였다가, 어느 순간엔 내가 두 사람이 되어 두 사람의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달까? 한통 한통 편지를 읽고 영어로 옮기면서 무엇보다 가장 크게 와닿은 점은 진화와 주리 모두 그동안 내실을 다지면서도 안에서 밖으로, 서로를 향해, 세상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었구나라는 깨달음이었어. 왠지 모르게 가슴 벅차더라.
진화야, 주리야. 울프는 『자기만의 방』 1장 끝에서 “밖에 갇히는”(locked out) 것보다 “안에 갇히는”(locked in) 것이 더 나쁠지도 모른다고 말해. (맥락은 다르지만) 나는 내 자기폐쇄적인 성향을 잘 알고 있어서 스스로를 고립하다 영영 내 안에 갇혀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곤 해. 나를 너희 프로젝트에 초대해줘서, 나를 밖으로 이끌어줘서 고마워.
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