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주리에게,
우리 지난겨울 바닷가에서 만나 자기만의 밖에 대해 얘기했잖아. 그때 나는 나만의 밖이 필요하다고 그랬지. 리치와 한집에 살고 싶은 마음과 새로운 세계가 있는 밖으로 향하고 싶은 마음이 힘겨루기 하고 있었어. 내 안에 리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나가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주리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알아낼 작정이었어. 니가 능청스레 건넨 러키참스 함정 덕분에 동물 얘기만 잔뜩 하고 말았네.
이제는 나의 이야기에서 동물이 빠질 수 없기 때문일 거야. 집집에서도, 가장 따듯한 리치 곁에 있으면서도 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동물 유령들, 유령과 딸려 오는 무서운 이야기 때문에 등골이 오싹해져. 가족의 식탁 위에 어김없이 죽은 동물들이 올라오니까. 곤히 자는 리치랑 있으면 너무나 행복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거칠어지는 걔 숨소리를 들으며 자책하기도 해. 코가 납작한 단두종인 리치는 그런 외모를 귀여워 한 인간의 잘못된 이기심 때문에 신체 구조상 숨쉬기 힘들게 만들어진 품종의 후손이거든. 이렇듯 한번 보이기 시작한 것들은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고 아른거리는구나. 리치를 사랑할 뿐인데, 리치 닮은 동물들, 사라져 가는 숲, 터전을 잃은 이들까지 자꾸만 신경 쓰인다. 내 마음이 오롯이 편안한 곳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 전에 세상의 끝이 온다고 해도 지치지 않고 사랑하면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고 싶다. 영화 〈돈룩업〉에는 지구가 거대 혜성과 충돌하기 전에 사랑하는 이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나와. 지구 속 모든 생명체를 절멸시킬 혜성이 오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이 위기를 똑바로 바라보고, 세상에 알리려 노력한 사람들이야. 위기 앞에 손 놓고 있지 않으려고 뭉친 이들은 힘닿는 대로 애쓴 뒤에 한집에 모여 저녁을 먹어. 우정과 사랑이 흐르는 식탁에 둘러앉아 와인을 마시며 누군가 이렇게 말해. “우리가 노력했다는 것이 감사해요”(I’m grateful we tried). 이 근사한 장면이야말로 내가 찾아가고 싶은 결말이라 생각했어. 내가 만나고 싶은 ‘우리’라고 생각했지.
알고 보니 나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더라고. 동물의 죽음 앞에 얼어붙고 유령에 시달리면서 깨달았어. 사람들이 분주하게 일상을 살면서 당연하게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에 혼자 사로잡혀 있는 내가 유난스럽게 느껴질 때마다 외로웠거든. 그런 나에게 안부를 물어봐 줘서 고마워. 나와 나란히 곰팡이 앞에 멈춰 서 있어 줘서 고마워. 니가 내 목소리를 끄집어낸 덕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재난”이라고 한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 결코 가늠할 수 없을 그들의 고통을, 그 많은 죽음을 잘 전하고 있는 걸까 조금 두렵기도 했어. 그렇지만 니가 유령이 보이진 않아도 가끔 내 목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용기를 냈다. 우리의 편지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목소리가 되어 닿는다니, 심장이 콩닥콩닥 해. 지금 나는 사랑에 빠진 것 같은 표정이야.
주리야. 니가 나의 소중한 바깥이 될 수 있을지 물은 적 있지? 내가 리치 때문에 동물의 삶을 남 일처럼 여길 수 없게 되었다면, 니가 있었기에 여성의 삶, 노동자의 삶에도 마음을 쓰게 됐다는 거 알랑가 몰라. 몇 년 전에 말이야, 많은 여성들이 분노하며 거리에 나와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을 때 이들이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몰라서 멀뚱거리는 내 곁에 니가 서 있어 줬어. 그러면서 내가 모르고 살던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 놨지. 실은 막연하게 알고 있었지만, 나도 참여하게 될 줄은 몰랐던 이야기들. 주리 덕분에 지키고 싶은 이야기를 위해 목소리 내는 법을 배웠어. 나는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면 너무 긴장되고 목소리가 떨려서 싫었는데, 이제는 떨리는 목소리를 내며 기꺼이 거리로,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됐다.
밖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내가 사랑하게 되는 이들이 늘어나고, 지키고 싶은 얘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친구들의 친구들로 연결되는 세계에 이렇게나 애정을 갖게 되다니. 그런데 혜성처럼 빠르게 위기가 오고 있다고 하니 이 세상이 금방이라도 무너질까 두렵고, 무력해지려고 해.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 뿐이라고 해도 곁에 친구가 있으면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아. 우리의 우정, 연대, 사랑과 함께 결말까지 가 보는 힘. 내가 무척 좋아하는 이 단어들을 가지고 어쩌면 우리가 죽지 않고 사는 이야기, 위기에도 불구하고 생존하는 이야기를 상상해 봐야지.
내가 늘 지갑에 넣고 다니는 부적이 있어. 서울살이에 마음이 다 소진됐을 때, 내가 제일 지쳤을 때마다 리치가 꿈에 나와서 나랑 소소한 일상을 보낸다고 얘기했더니 니가 그려 준 그림이야. 리치를 무릎 위에 올리고, 둘이서 버스 타고 어디론가 가는 꿈 그림. 이 부적처럼 리치를 안에 품고서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아. 뒤늦은 보답으로 알록달록하진 않지만 찬바람을 이겨 내는 내 버섯전골 레시피를 바친다.
사랑을 담아,
진화 올림
[버섯전골 레시피]
2인 기준 (더 많은 사람을 위한 전골은 채수와 야채 많이. 혼자서는 두 끼 먹을 수 있는 양 혹은 재료를 줄여보자)
재료: 마음에 드는 버섯, 두부, 무, 양파 1/2개, 청경채, 쑥갓, 알배추(뉴욕에 있을 리 없겠지?) 등 좋아하는 야채, 매콤한 맛을 원한다면 청양고추나 할라피뇨
간장 1스푼, 다진 마늘 1스푼, 소금&후춧가루 조금, 베지터블 스톡(옵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