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리에게
편지 잘 받았다. 니가 부른 내 이름이 머릿속에서 자꾸자꾸 메아리쳐서 손을 뻗으면 내 이름을, 네 목소리를 거의 만질 수 있을 것 같아. 이제는 내 차례가 됐네. 주리야. 이 편지가 닿을 즈음엔 니가 혜화를 떠났을까?
난 지금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어. 내 집집으로 가기 위해, 내 강아지 리치를 만나기 위해, 짱 빠른 기차(Super Rapid Train)를 타고 최고 시속 300킬로미터로 달리고 있어. 안과 밖의 경계에 대한 네 물음에 답하자면, 리치가 있는 그곳이 바로 나의 안이야. 새가 태어나는 알 속 같은 그런 안 말이야. 박혁거세의 후손답게 안에서부터 부화하는 것이 내 운명일까? 왜 밖으로 나와야만 했는지 이제는 기억도 안 나지만, 아무튼지 간에 부산집을 떠나 서울살이를 한 지 벌써 10년이야. 그 10년 동안 리치에게 돌아갈 생각을 놓았던 적이 없어. 그러면서도 나는 어김없이 집 밖을 나서. 리치가 없는 밖에서 뭘 구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주리만의 안은 네 몸이라니 나랑 참 다르다. 그리고 부러워. 나도 내 한 몸으로 온전하고 싶지만 그게 잘 안돼. 오랫동안 나의 중심에는 가족이 있다고 여겨왔던 탓일지도 몰라. 지금은 나의 중심을 오롯이 나로 채우려고, 내가 되려고 애쓰고 있어. 어쩌면 그러려고 집을 나왔는가 봐. 혈혈단신 돌아다니다 보면 나인 몸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나만의 안인 몸을 가질 수 있는 비결이 뭔지 궁금해. 그 안에 있으면 어떤 느낌이야?
나는 리치랑 있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아. 갯과(canid) 동물인 리치는 사람과(hominid) 동물인 나보다 체온이 조금 높아서 걔랑 피부를 맞대고 있으면 무지 따듯하고 포근해. 둘이서 나란히 바닥에 배 깔고 누워, 걔 숨소리에 내 숨을 맞출 때만큼이나 안온한 순간은 없을 거야. 그러고 있으면 내 몸의 경계를 잊어버리고 황홀감에 빠지는 듯이 정말 좋거든.
니가 괴롭고 불편한 것들을 밖에 둔다고 했잖아. 나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밖에 있으면 내 몸의 경계가 생생하게 느껴져.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또 싫어하는지, 어디가 좀 따듯하고 서늘한지 나만의 바깥 지도를 그릴 수 있어. 그렇게 바깥을 조금씩 넓히면서 나라는 사람을 알아가고 만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야. 그렇지만 내가 너무 멀리 나가는 바람에 리치에게 제때 돌아가지 못할까 봐 두렵기도 해. 어느덧 나이가 들어버린 나의 강아지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는데.
내가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주리는 바다 건너 새로운 세계로 간다니! 니한테 자기만의 안은 몸이니까, 달팽이처럼 집을 이고 지고 다니니까, 더 멀리 갈 수 있는 것처럼 보여. 주리야, 니가 밖으로 향하는 이유는 무엇이야? 네 몸 이외의 것, 괴롭고 불편한 것이 가득한 세계로 기꺼이 나가는 그 이유 말이야. 먼 곳으로 이사를 간다는 소식에 묻고 싶은 것이 많다. 니가 가닿는 밖을 엿보고 싶어.
터널을 짱 빠르게 지나가는 기차 안에서,
진화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