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진화에게:
자기만의 밖
여섯 번째 편지

주리에게

할렘에서 떡볶이를 먹기 위해 대파 한 단을 담은 주리야. 니 장바구니 품목이 내 것과 많이 겹쳐서 웃음이 나더라. 니가 남몰래 서울의 어느 시장을 돌아다니고 있을 것만 같다. 나도 내일 망원시장에 가서 대파 한 단과 두부 한 모를 담아 와야지. 우리가 여전히 같은 걸 먹을 수 있어서 좋아. 음식 나눠 먹는 민족 아니랄까 봐.

편지 받았을 때가 한가위였어. 나는 부산에 내려가 아빠의 엄마네 집에서 점심을 먹고, 엄마의 엄마네 집에서 저녁을 먹었지. 일가친척이 한 상 앞으로 모여드는 명절은 나에게 꽤 긴장되는 시간이야. 엄마는 명절에 나눠 먹으려고 늘 나물을 하는데, 이번에 엄마 나물을 본 할머니가 “이 비싼 시금치를 다 하고 간도 크다” 했어. 여기도 물가가 많이 올라서 시금치 한 단이 9,000원이래. 간 큰 엄마 덕에 시금치를 먹을 수 있다는 게 너무 웃겨서 소리 내어 웃다가 식탁 위에 나물과 나란히 올려진 소의 살점이 눈에 들어왔어. 소를 먹기 위해서는 얼마나 간이 커야 할까, 가늠해 보려다 살 타는 냄새에 정신이 아득해졌지 뭐야. 

소시지가 대파보다 싼 음식이라니 뭔가 이상해. 얼마 전에 마트에서 6,990원짜리 치킨을 팔아서 사람들이 ‘오픈런’하고 난리가 났다는 뉴스도 봤어. 동물은 사료 먹여야 하지, 분뇨 치워야 하지, 도살장에 실어 가서 말끔하게 손질하거나 가공해야 하는데도 채소보다 싸다니. 게다가 동물은 움직이잖아. 자기 욕구에 따라 뭔가를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어. 옆에 있는 다른 동물에게 흥미를 느끼거나 서로를 공격할 수도 있겠지. 위기를 느낄 땐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려고 할 거야. 팔다리를 휘적거리면서. 농부의 삶과 거리가 먼 내가 짐작해 보기에는 가만히 있는 채소를 기르는 일이 훨씬 덜 번거로울 듯 한데 말이지. 너무 비싸서 놀라운 채소와 너무 싸서 놀라운 동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시금치는 심고 나서 수확하기까지 30–40일이 걸린대. 여느 작물처럼 가뭄, 폭우, 태풍 등 날씨 영향을 받으면 출하량이 줄어드는 데다가 시금치는 저온 작물이라 폭염에 특히 취약하다고 하네. 기후 위기 시대에 우리가 시금치와 작별하게 될 날이 머지않았을지도 몰라. 시금치 없는 김밥이라니! 흉작으로 채솟값이 많이 올랐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금치 한 뭉치가 닭 한 명의 목숨값보다 비쌀 수가 있나? 닭을 부화시켜서 도살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30일 남짓 된대. 닭의 자연 수명은 10년이 넘는데, 치킨을 최대한 빨리, 많이, 싸게 생산하려고 얼른 도축해 버리는 거야. 사실 치킨이라고 불리는 음식의 정체는 병아리야. 24시간 내내 조명이 켜진 방에 갇힌 병아리들은 온종일 잠 못 자고 사료만 먹다가 한 달이 지나면 1.5킬로짜리 ‘육계’가 돼. 도살장으로 보내어진 이들은 삐약삐약 하고 울어. 그렇게 2021년 한 해 동안 한국에서 도살된 닭은 10억 3,565만 명. 그러니까 매일 2,837,000명이 덜 자란 몸으로 죽은 거야. 

죽음의 숫자가 크니까 실제가 아닌 것 같다. 이런 비현실적인 숫자들은 끝도 없이 이어져. A4 종이를 반 접은 것보다 조금 큰 케이지에서 달걀을 낳기 위해 길면 1년 살다 도축되는 닭의 명수, 알 못 낳는다고 태어나자마자 분쇄되는 남성 병아리의 명수, 1년에 두 번씩 3년간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다 도살장으로 보내어지는 여성 돼지의 명수, 아이를 낳자마자 빼앗기고 젖은 사람 줘야 하는 여성 소의 명수. 이름과 숫자의 기괴한 병렬을 보고 있으면 전부 거짓말 같아. 도시 한가운데 살면서는 죽음의 기척을 느끼지 못하니까, 숫자에서 눈만 돌리면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는 듯한 풍경만 보여. 

어떤 사진은 이름과 숫자를 나란히 보는 것보다도 현실감이 떨어져. 인터넷에서 우연히 한 이미지를 봤는데, 덤블도어가 관자놀이에서 뽑아낸 기억 실타래처럼 희뿌연 것이 뒤엉켜 있더라고. 사진과 함께 알 수 없는 숫자가 쓰여 있었어. 84879.

이게 대체 뭘까. 한참 들여다봐도 모르겠더라. 찾아보니 문선희 작가의 『묻다-전염병에 의한 동물 살처분 매몰지에 대한 기록』에 실려 있는 사진이었어. 구제역과 조류독감을 막으려고 동물들을 구덩이에 밀어넣어 흙으로 덮은 땅의 3년 뒤 모습이야. 가축 사체를 묻은 땅은 3년이 지나면 법적으로 사용 가능해진다는 말을 듣고 정말 그런지 직접 찾아가 봤다고 해. 땅을 목격한 작가의 말을 그대로 옮겨 볼게.

“갈라진 틈 사이로 솜뭉치 같은 곰팡이가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농장 주인이 환기도 시키고, 새 흙도 가져다 부었지만 허사였다. 곰팡이는 보란 듯이 모래와 흙더미를 부둥켜안고 억세게 퍼져 나갔다. 저 밑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저 현장에 가 있는 듯 땅의 냄새와 질감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어. 물컹거리는 땅과 그 아래까지도. 사진 옆에 붙은 숫자는 그 땅에 산 채로 파묻힌 동물들의 수야. 2010년 겨울에 구제역이 확산하자 정부는 ‘예방적 살처분’이라며 병들지 않은 멀쩡한 소와 돼지까지 몽땅 쓸어 담아 354만 명을 묻었어. 그때 생긴 매몰지만 해도 전국에 자그마치 4,799곳이나 된대.

올겨울에도 조류인플루엔자 때문에 712만 명의 닭과 오리가 생매장됐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712만 명의 죽음이 아닌 치킨 가격을 걱정하더라. 나는 치킨값에 매겨지지 않은 것들이 걱정되기 시작했어. 곰팡이 피어오르는 땅, 분뇨 흘러드는 강물, 시체 썩은 물로 오염된 지하수에 대한 값은 어디서 얼마나 쌓이고 있을까? 내겐 참 곤란하고 버거운 질문이다. 그 대가가 세계의 취약한 곳에서 가장 가혹하게 치러친다는 사실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야.

니가 잘 짚어 주었듯이 비싼 동물, 비싼 채소를 사 먹을 수 없는 삶과 ‘채식주의’를 함께 얘기하는 일은 많은 고민이 필요한 것 같아. 그치만 내게 그보다 긴급한 일은 육식, 공장식 축산업, 기후 위기와 불평등이 아주 단단히 엮인 문제를 더 많은 사람들과 바라보는 거야. 소 먹을 만큼 돈이 있는 사람들 배를 채우기 위해 변방에서는 소를 잔뜩 기르고, 소 먹일 사료 작물 재배하느라 숲이 다 사라지는 동안에 어디서는 홍수가 나고, 지독한 가뭄이 계속돼. 기후 위기는 이미 우리가 목격하고 있듯이 가난한 사람들의 집과 땅을 가장 먼저 앗아가. 폭우가 내리면 누군 멀쩡히 퇴근해서 집 가는 동안 반지하 집은 잠기고, 가뭄이 계속되면 누군 생수 사 먹는 동안 할렘에서는 소화전이라도 트는 건가 봐. 나는 어느 쪽일까. 내가 살아갈 땅은 어느 쪽일까. 나의 바깥을 지키기 위해서 무얼 할 수 있을까. 

나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도살장과 매몰지가 있지만 나는 내 일상을 살아. 가끔 허연 곰팡이 땅이 생각나긴 하는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냥 하루하루 살다가 내가 살아가는 바깥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때면 얼떨떨해서 멈춰 설 뿐이야. 니가 엄마 아빠의 가게 안에서, 식탁 앞에서 멈추었던 것처럼. 주리의 질문과 이야기들도 나를 멈추게 해. 멈추어 선 다음에 생각해. 우리에겐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있잖아, 나는 우리가 질문 뒤에 다른 질문을 잇고 이야기 위에 다른 이야기를 얹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아. 

주리야. 니한테 보내는 말들을 늘어놓는 사이 밤이 깊었네. 요즘 서울의 날씨는 뭐랄까, 가을의 찬란함으로 가득해. 우리에겐 찬란한 가을이 몇 번 더 남았으려나. 니가 소중하게 여기는 바깥에 내가 있다는 말이 무척 아름다워서 몇 번이나 다시 읽었어. 나도 내가 밖에 나온 덕에 니를 만나 얼마나 좋은지 몰라. 그러니까, 나중에 할머니 되어서도 우리 사는 바깥이 물에 잠기거나 메마르지 않아서 날씨 좋은 날 오손도손 피크닉 할 수 있음 좋겠다. 나이 들면 지금과 입맛은 좀 달라지겠지만 여전히 같은 걸 먹으면서, 시금치나물 노나 먹으면서 이 비싼 걸 먹고 간도 크다 하고 깔깔거리자. 그때쯤 리치는 늙어서 죽고 내 곁에 없겠지만 내 부산집도, 주리의 엄마 아빠 집도, 지금처럼 늘 있던 데 있으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안도감과 익숙해지지 않는 위기감을 주면 좋겠다. 거기 갔다 올 때마다 흥미진진한 얘깃거리를 잔뜩 싸 들고 와서 우리만의 포틀럭 파티를 하자. 그렇게 늙어 죽을 때까지 이 세상이 망하지 않아야 할 텐데. 보고 싶다, 주리야.

 

주리의 할렘 떡볶이 맛이 궁금한,
진화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