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에게
한국에 한차례 태풍이 왔고, 한 번 더 태풍이 올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 며칠 전에 본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너에게 직접 들으니 느낌이 다르구나. 똑같은 한 줄짜리 정보인데 말이지. 우리 연구실과 너의 집 주변, 네가 기차를 타러 가는 길이 안전하기를 바란다. 리치가 있는 너의 안도.
벌써 9월이지만 여기는 아직도 여름 같아. 네가 준 나시를 잘 입고 있단다. 습도가 낮고 기온은 높은 나날이 이어지고 있거든. 한국의 습도 높은 여름이 무척 힘들었던 내게는 무척 쾌적한 날씨야. 그치만 이곳에 오래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이 또한 걱정거리라는 걸 알게 되었어. 진화야, 여기는 가뭄이 심각한 문제야. 강우량이 예년보다 눈에 띄게 감소했고 그만큼 활용할 수 있는 물의 양도 적어졌어.
너무 더운 날이면 여기 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생경한 풍경이 하나 있어. 누군가 틀어놓은 소화전에서 물이 아스팔트 위로 콸콸 쏟아지는 풍경. 처음에는 무언가 잘못된 게 아닐까 싶어 한참을 지켜보고 서있었어. 가뭄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물을 콸콸 낭비해도 되는 건가 싶어서. 아무튼 당황은 나만 했고, 주민들은 평온해 보였어. 누군가는 컵을 가져와 그 물을 그냥 마시고, 받아 가고, 세수를 하고, 몇몇 아이들은 물장난을 치고. 내가 할렘 중에서도 조금 더 외진 거리에 살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낭비라고 생각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깊이 스며든 생활의 일부인가 싶더라. 아직도 잘 모르겠어.
사실 지난 편지에 마시멜로 이야기를 쓰면서 고민을 했어. 마시멜로에 돼지의 일부가 들어간다는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거든. 그러니 미안해할 필요 없어. 알면서도 쓴 내가 고약하지. 나의 이런 능청스러움에도 동물성 젤라틴이 들어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미안함을 가불해도 된다면, 꺼내고싶은 이야기가 있어. 내가 구성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내 곁에 있는, 나의 가장 가까운 밖에 대한 이야기야. 죽음이 가득한 이야기라 네가 원치 않는다면 여기에서 읽기를 멈추어 주렴. 너를 괴롭히려고 쓰는 글은 아니야. 진심으로.
나의 부모님이 시장에서 오랫동안 가방 장사하시는 것을 알고 있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운영하셨으니까 벌써 서른 해가 훌쩍 넘었네. 장사를 하는 부모님에게는 햇수만큼 오래된 자부심이 하나 있는데 그건 당신들이 일대에서 ‘제일 좋은’ 가죽 가방을 판다는 거야. 나는 유년 시절의 많은 나날을 이 가게에서 보냈어. 가게가 집과 가까워서 종종 가게를 보면서 티브이를 보거나 기탄수학을 풀었거든. 가끔 나만 있을 때 손님이 오기도 했어. 그럴 때면 집과 연결된 인터폰 버튼을 꾹 눌러 아빠나 엄마를 부르고 2-3분 정도 손님을 붙잡아두는 일이 주어졌지. 나는 이렇게 말하곤 했어.“엄마 곧 오신대요. 둘러보고 계시면 금방 오실 거예요. 최고급 소가죽이에요.”
엄마 아빠의 작은 가게는 아직도 내게 무척 안락한 곳이야. 가끔 본가에 들르는 날이면 가게에 먼저 가는데, 문을 열 때마다 염색된 소가죽 냄새가 진동을 해. 익숙한 냄새. 그 냄새에서 나는 비록 가게가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유지되고 있다는 어떤 안도감을 느껴왔어. 몇 년 전까지는, 그러니까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야. 너를 만나서 리치와 너, 그리고 네가 그때 막 시작한 동물권 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나는 이 냄새를 한 번도 죽음의 냄새라고 생각하지 못했단다. 지금 생각해보니 진화, 너는 근 몇 년간 내가 구성한 소중한 바깥의 일부이구나.
하지만 진화야, 나는 유령이 보이지는 않아. 어쩌면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지. 이를테면 가게에 줄줄이 걸려있는 가죽 가방들을 볼 때. 오랜만에 딸이 왔다고 엄마가 무리해서 소고기를 사서 구워줄 때. 나는 그냥 가만히 고기가 익고 기름이 튀는 것을 보고만 있어. 가끔 이런 나에 대해 거리를 두고 생각해보는데, 그때마다 전전 세대 유행했던 남성 작가의 자의식이 가득 담긴 소설 구절들이 생각나. 학교와 거리에서 페미니즘과 환경에 대해 배우지만 이럴 때마다 나는 내가 살아보지도 않은 70-80년대 가난한 남성 지식인이 된 것만 같고.
최근 수업 시간에 『가난한 퀴어 연구』(Poor Queer Studies)라는 책을 읽었어. 저자 맷 브림(Matt Brim)은 뉴욕 스탠튼 섬(Staten Island)에 위치한 뉴욕시립대 캠퍼스에서 퀴어 이론을 가르치는 조교수야. 이 학교는 뉴욕시립대 중에서도 노동 빈곤층 비율이 높은 캠퍼스래. 브림이 이 학교에 지원했을 때 사전 질문으로 “퀴어 연구 수업을 하는 교실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받았대. 그때는 이 질문의 의도를 잘 몰랐지만, 학교 안팎에서 다양한 어려움을 겪는 가난한 학생들을 보면서 브림은 깨닫기 시작했대. 그때 그 질문이 단순히 대학 수업 시간에 퀴어 이론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이 학생들에게, 이 학교에서, 이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다룰 것인지 묻는 질문이었다는 것을 말이야. 지금까지 퀴어 이론이 성적 정체성뿐 아니라 인종, 민족, 계급 등 다양한 정체성이 교차하며 발생하는 차별이나 특권을 다루어왔지만 생각보다 가난은 잘 다루어진 것 같지 않다면서 자신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쓰기 시작한 거지.
네 편지를 읽으면서 ‘가난한 채식주의’ 같은 것도 있을까 궁금해졌어. 가끔 주변에서 농담처럼 ‘풀 뜯어 먹으며 살아도 안 죽는다’고 하는데, 내게 ‘가난한 채식주의’는 풀 뜯어 먹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인 것 같아. 특별히 육식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닌데 내가 집어온 시리얼에 돼지의 일부가 들어있는 것 처럼 말이야. 요즘 물가가 너무 올라서 채소와 과일 가격이 장난 아니더라. 어제는 마트에 가서 과일 중 제일 싼 바나나 한 송이를 담은 뒤에 큰마음 먹고 10달러짜리 대파 한 단도 담았어. 떡볶이를 먹고 싶은데 집에 대파가 없더라고. 제일 싼 것은 알 수 없는 온갖 동물의 고기를 합쳐놓은 소시지이지만, 그건 내 몸에 해로울 것 같아서 담지 않았어. 그러고선 두부 한 모, 아몬드 브리즈, 냉동 블루베리, 두유 요거트를 들고 돌아왔어. 나는 유령이 보이진 않지만, 가끔 네 목소리가 들려.
너는 한 번도 내가 먹고, 쓰는 것을 탓한 적이 없는데 이렇게 쓰고 나니 제 발 저려서 긴 변명을 한 기분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너와 함께 일상을 공유하고, 사랑하고 살고 싶기에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했어. 너는 내 소중한 바깥인데, 나도 네게 그럴 수 있을까?
PS: 오랜만에 옥자를 검색해서 영화 클립을 보았어. 무심하게 귀여운 옥자 얼굴에서 네가 종종 보여주는 리치가 떠올라 웃었다.
살이 많이 탄,
주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