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진화에게:
자기만의 밖
일곱 번째 편지

진화에게

수업이 끝나고 몹시 허기진 상태였어. ‘아무거나 먹고 싶다’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더라. 피자 한 조각 욱여넣고 지하철을 탈까, 그냥 집에 가서 자버릴까 고민하던 순간에 네 메일을 받았단다. 너 사실 다 보고 있지? 나타나줘 진화야. 보고 싶어.

네가 보내준 편지 속 ‘찬란’이라는 단어를 손에 꼭 쥐고 집에 잘 도착했어. 도착하자마자 따뜻한 물 한 잔 마시고 가스불을 켰다. 남은 순두부찌개와 밥을 덥혀 먹으니 가방 정리할 힘도, 빨래할 힘도 났어. 이렇게 노트북을 켜고 그 앞에 앉을 힘도 났지. 그리고 ‘찬란하다’를 사전에서 찾아보았어. 눈부시다. 강렬하다. 훌륭하다. 밝고 아름다운 것은 모두 이 단어가 끌어갔구나. 그래, 진화야. 가을에 더 이상 찬란하다는 수식어를 붙일 수 없는 날이 곧 오더라도 그 계절 우리가 사는 대로 맞이해보자. 

너는 우리가 무선망으로 실뜨기 놀이를 하는 것 같다고 했지. 너 실뜨기 중에 ‘함정’을 만드는 법 알고 있니. 실뜨기를 잘하는 친구들은 꼭 함박 웃으며 내게 한 번씩 ‘함정’을 떠서 들이밀더라. 내가 검지와 엄지를 어떻게 걸던 거는 순간 실이 후루룩 풀어지게 말이야. 너는 이번 편지를 ‘뜨면서’ 어떤 마음이었니. 소고기 대신 소의 살점. 마리 대신 명. 암/수퇘지 대신 여성 돼지와 남성 돼지. 새끼 대신 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재난을 눌러쓴 네 마음은 어땠을까. 그러고 보니 너야말로 간이 크다 진화야. 간이 큰 친구를 둔 덕에 생각의 타래를 전에 없던 곳으로 굴려본다. 거리로, 냉장고로, 내 몸 안으로. 지금 네 표정이 너무 궁금하구나.

나는 짐짓 지은 무표정 뒤로 아찔한 마음을 숨기고 있어. 그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몇몇 글과 친구들을 통해 알고 있어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겠다. 애써 외면했다고도 할 수가 없네. 애쓰지 않았으니까. 어제도 마트 계란 코너에서 한참 서성이면서 내가 했던 고민은 이 제품이 충분히 신선한지, 여섯 알을 살지, 여덟 알을 살지, 그런 것들이었어. 다른 의미에서 이 곰팡이는 참 찬란하네. 우리가 죽었다고, 죽어서 사라졌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 이렇게 강렬하게 살아있다면 대체 우리는 그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슨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냥 그 앞에 멈춰 서 있어.

사실 나는 치킨값을 걱정해. 매일 전단지를 보며 벼르다가 치킨 세일을 하면 어렵게 지갑을 열고 한 통 사오는 사람들을 알거든. 모두가 재난을 재난으로 인식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지만 어떤 이들은 다른 이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각자 삶에서 벌이는 전투가 너무 클지도 몰라.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치킨값도 걱정이 된다. 하지만 진화야, 이 편지는 네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떠준 것이잖아. 이런 나를 잘 알면서도 편지를 보내준 네 마음이 참 고맙다.

피크닉과 포틀럭 파티라는 단어가 얼마나 탐스럽던지 마지막 문단을 몇 번이나 소리내어 읽어 봤다. 나 한 번도 나물을 직접 무쳐본 적이 없어. 사실 밥솥도 뉴욕에 와서 처음 써본 거야. 물가가 비싼 덕에 밥해 먹고 사네. 할렘 떡볶이 맛은, 고추장, 간장, 설탕 조금에 떡을 푼 맛이야. 내게는 이게 떡볶이이긴 한데, 친구들에게 줄 수는 없는 떡볶이. 요리를 많이 해보지 않은 걸 요즘 후회하고 있단다. 하지만 노인이 되기 전까지 뭐라도 연마해볼게. 같이 노인이 된 네가 ‘이 비싼 시금치를 이렇게 무쳤냐, 간도 크다’ 깔깔댈지도 모르겠다. 

PS: 여기 사는 친구에게 소화전에 대해 물어보았어. 친구 말로는 ‘뉴욕 전통’이래. 할렘을 배경으로 한 70–80년대 영화를 보면 소화전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는 장면이 빠지지 않고 나올 정도로 말이야. 할렘에 사는 사람들, 특히 흑인들은 더위를 피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대. 수영장이 몇 개 없어 늘 붐비기도 했고, 그나마 있는 수영장에 흑인들은 입장도 불가능했대. 그래서 찾은 피서 대안이 소화전이래. 지금 여기 이스트 할렘에는 이전보다 더 다양한 인종이 모여살고 있지만 글쎄, 어떤 것들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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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초보 주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