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리에게
할렘에서 온 편지는 비행기보다 빠르던걸! 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나 봤더니 서울과 부산을 17번 왕복하는 거랑 같은 거리래. 리치를 열일곱 번 보고 올 수 있는 만큼을 주리는 단번에 간 셈이야. 정말 멀리도 갔다. 그렇지만 내가 화면의 메일 ‘보내기’ 버튼만 클릭하면 눈 깜짝할 새에 니한테 신호가 갈 테니, 우리는 손가락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걸지도 몰라. 무선망으로 턴을 주고받으며 실뜨기 놀이를 하는 듯해.
야심한 시간에 니가 말해 준 럭키 참스 시리얼을 생각하고 있자니 출출하다. 럭키 참스를 먹어본 적은 없지만 사진을 찾아보니 맛을 알 것 같았는데, 상상한 맛이 아니라는 후기가 있더군. 이러면 꼭 먹어 보고 싶어진다니까. 나도 속도 높이는 힘을 좀 얻어 볼까 했더니 아쉽게도 럭키 참스는 젤라틴, 그러니까 돼지의 일부를 함유하고 있어서 나는 못 먹는 것이더라.
리치를 만나고 나서 번거롭거나 유감스럽게 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언제부터인가 리치 닮은 자들을 먹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뭔가를 사 먹을 때마다 소, 돼지, 닭이 들어가 있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있어. 과자 하나, 컵라면 하나 살 때에도 포장지 뒷면에 있는 원재료명을 먼저 봐야 하지. 국내에 유통되는 식품은 식품위생법에 따라 알레르기를 유발할 수 있는 물질을 원재료명에 표시해야 하기 때문에 난류, 우유, 돼지, 닭, 소, 조개류, 고등어, 게, 새우 등의 성분은 쉽게 확인할 수 있어. 그렇지 않았다면 알록달록한 부적들이 들어있는 시리얼에 돼지가 들어가 있는 줄 누가 알았겠어? 번거로움은 둘째치고, 내가 익숙하게 살아왔던 세상이 심히 괴상하게 느껴져 매번 놀란다.
이건 리치를 내 안에 들이면서 생긴 변화야. 바깥 풍경이 참 다르게 보여. 나와 비슷한 이유로 육식을 그만둔 사람들은 이걸 매트릭스의 빨간약 먹은 효과에 빗대곤 하더라. 세상은 그대로인데 죽은 동물들이 너무 많이 보여. 리치와 똑같고 나와 똑같이 털 나고 팔다리 달린 몸통에 심장, 허파, 두뇌, 내밀한 장기들이 가득 들어차서 온갖 감각을 다 느끼며 사는 동물들 말이야. 이들은 고유한 이름 대신에 음식이나 성분의 이름으로 호명돼. 소는 쇠고기 혹은 패티, 닭은 닭고기 혹은 치킨, 돼지는 돼지고기 혹은 젤라틴. 패티를 입에 넣었을 적의 나는 그것을 이루는 존재가 한때 리치와 닮은 심장을 가졌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없었어. 이제는 사람들이 먹고 입고 쓰는 거의 모든 것에서 죽은 자의 얼굴을 떠올리는 일이 내 일상이 됐다.
주리는 내 안에 리치가 있다는 게 부럽다고 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안을 가진 대가로 바깥 어딜 가나 유령이 보인다면 달리 생각할지도 모르겠어. 리치는 어떻게 나를 이만큼 치명적으로 바꾸어 놓았지? 목소리가 좀 우렁차긴 해도 12킬로밖에 안 되는 조그마한 강아지가. 마주 보고 누운 리치의 콧바람에 내 얼굴이 간지러워지면 12킬로짜리 몸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벅찰 때가 있어. 작은 심장의 뜀박질이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져서, 그 몸의 온기와 생기가 진짜라는 것이 틀림없어서, 내 앞의 작은 존재에 압도되어 버려. 리치보다 10배 더 무겁다는 돼지도 틀림없이 진짜로 살아있을 거야. 그 앞에 서면 나보다 큰 존재의 생명력에 압도되고 말 거야. 그런데 1인분에 200그램 덩어리로 조각난 것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어느 날엔 조각나기 이전의 몸을 어렴풋이 상상해 봤더니 식탁 위에 뭔가 보이더라고. 죽음을 목격한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세스트럴(*『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생물)처럼 압도적이게 슬픈 형상을 한 동물이었어.
내 가족이 바깥에 나갔다가 잡아먹힐 수도 있는 세상에 산다는 건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무섭다. 리치가 개가 아니라 오골계였다면, 황소였다면 얼마나 더 공포스러웠을까! 봉준호 감독의 〈옥자〉는 나에게 무척 현실적인 공포영화였어. 게다가 옥자 얼굴이 리치와 많이 닮았거든. 나에게도 리치에게도 살기 좋은 땅이 있으면 좋겠다. 몸을 해치지 않는 땅. 강간과 도살이 없는 땅. 아무래도 사람 사는 곳에서 그런 땅을 찾긴 어렵겠지. 그러면 나처럼 세스트럴을 보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사는 땅이라도 찾아가면 좋겠네. 나와 함께 일상을 살면서 사랑하고, 압도되고, 슬퍼하는 동료들이 있으면 정말 좋겠네. 그러니까, 리치가 내 밖을 구성하는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했다면 맞았어. 리치 덕분에 내가 가고자 하는 밖을 꽤나 구체적으로 머릿속에 그릴 수 있게 되었거든. 거기에 도착하면 새로운 집을 짓고, 리치처럼 내 안에 들일 누군가를 또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밖으로 나가서 살기 좋은 땅을 찾는 방법도, 함께 집 짓고 같이 살 파트너를 만나는 방법도 잘 모르겠다. 어쩌다가 리치가 내 안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나 또한 그걸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의 치명적인 매력에 마음이 다 열리고, 원래 없던 마음의 공간까지 생겨서 그렇게 되었다고나 할까. 리치는 몹시 다정하고, 소진되지 않는 사랑을 주는 법을 알아. 세상에 이토록 꾸준한 애정 공급원이 존재할 수 있다니 여전히 믿기지 않아. 리치로부터 받은 사랑이 쌓이면서 나도 다른 존재에게 사랑을 주고 싶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어. 앞선 편지에서는 혼자의 몸으로 온전하고 싶다고 했는데, 실은 내가 온전하도록 사랑을 보태어주는 ‘당신’이 없으면 나는 못 살 거야. 서울집에 돌아와 혼자 오도카니 있으니 무지 쓸쓸해서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그래도 집집 갔다 와서 조금 충전됐으니 새로운 밖을 탐색할 궁리를 해 봐야겠어.
여기까지 쓰고 돌아보니까 낯선 곳에서 주리에게 힘을 준 러키 참스인데 별의별 얘기를 다 해서 미안해. 네 몸에 쌓인 오만 색 부적들이 소임을 다하고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 할렘에 가져간 짐은 다 풀었으려나? 어떤 물건이 어느 자리를 차지했는지 궁금하다. 한국은 얼마 전에 무시무시한 태풍이 왔었어. 너무 덥고 비가 너무 많이 내렸던 여름이 지나가고 마침내 가을이 온 듯해 다행이지만 또 다른 태풍이 오고 있다고 하네. 거기 기후는 어때? 살 만한 땅인지 소식 들려줘.
풀벌레 소리가 요란해진 망원에서,
진화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