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리에게
주리 안녕! 개강 초라 정신이 혼미할 것 같구나.
9월 들어오니 놀랍게도 아침저녁으로 조금 선선해. 이런 날씨는 언제나 조심해야 해. 요즘 말투로 하면 가을 날씨 특: 흥분됨. 생각해 보니 가을만 그런 것 같진 않다. 계절 바뀔 때의 느낌은 왠지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것 같아. 일조량 변화에 따른 호르몬 농간인 것도 있지만.
어제 오랜만에 데이트 비슷한 걸 했다. 바이로 살다 보니 이성애 하는 남자를 만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정신이 번쩍 들어. 내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그 사람들이 명확히 알려줘. 나나 내 주변 퀴어따리들의 세계가, 많은 이성애자 친구들의 인지 체계에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될 때마다 새삼스럽게 놀라고 신기해한다. 어제도 그랬어. 재미가 없진 않았지만 설명할 게 너무 많은 관계는 요즘엔 시작하지 않는 것 같아. 시간과 여유가 좀 더 있었더라면 내 마음가짐이 달랐을까. 최근에 주변에서 본 적 없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서 부자로 사는 건 어떤 삶인가에 관해 인터뷰하고 온 것만 같네.
어정쩡한 기분으로 이반지하(사랑해!!) 방송 들으며 집에 돌아오는데, 마침 퀴어 어쩌고 사연이 나오고 있었어. 이반지하님이 여러 세상을 살수록 각 세상의 현타가 있다고 참말을 또 하셔서 감탄했다. 여러 세계에 드나드는 것 같은 요즘의 나에게 너무나 위로가 되는 말이었어. 이성애 현타, 동성애 현타, 부자 현타, 자영업 현타 등등.. 나는 이성애자도 아니고 동성애자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고 자영업자도 아니지만, 각각의 집단과 조금씩 공유하는 부분이 있어서 느끼는 ‘아…’ 싶은 순간들을 알아. 아무튼 날씨에 속아 헐레벌떡 연애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집에 왔어.
지지난 주엔 발목이 나가서 깁스를 했어. 발목 부상을 한 서너 번 입었었는데 그때마다 대충 치료하고 넘어갔더니 이번에는 수영하다가 발목이 나가버린 거 있지.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과거에 받았던 치료가 잘되지 않아서 발목에 뼛조각이 있고 인대도 거의 구실을 못 하고 있대. 인대 재생을 도와주는 DNA 주사도 맞고 충격파 치료도 받았어. 충격파 치료 받아본 적 있어 주리야? 아픈 걸 잘 참는 편이라고 자부심 있게 말했던 과거의 발언을 다 취소해야 할 것 같아. 충격파 치료 충격적으로 아프다. 누워서 치료를 받다보면 너무 아파서 물 밖에 나온 생선처럼 몸을 퍼덕거리게 돼. 더 악화되면 수술해야 한다고 해서 이번에는 집에서 재활운동을 좀 열심히 하고 있어. 되게 별거 아닌 것 같은데 너무 중요하더라고. 이 지경이 되어야 깨닫는 것이 참. 삶의 모든 것이 대체로 그런 것 같아. 요즘에 ‘아.. 그게 중요한 거였구나..’ 하는 생각을 여러 군데에서 자주 해. 주리야. 네가 요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뭐야? 항상 사람들은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잖아. 나도 그렇고. 근데 왜들 그렇게 중요한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까?
며칠 전에는 글쓰기 워크숍에 다녀왔어. 최근에 그런 자리를 간 적은 별로 없는데, 내가 쓰는 글이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히는지 궁금하더라고. 그런 자리는 귀하다는 생각도 들어서 냉큼 신청했지. 어느 미술 전시회를 보고 각자 하나씩 작품을 정해서 그 작품의 해설을 써보는 거였는데, 시간을 정해놓고 사람들과 함께 순식간에 집중해서 짧은 글을 써내는 게 꽤 재밌었어. 마감의 중요성도 다시 느꼈어. 특히 나 같은 사람에게는 마감이 너무 중요한 것 같아. 촉박할수록 불타는. 한편으로는 서로가 만들어내는 것들에 대해 열렬히 의견을 주고받은 게 언제였나 싶더라고. 당연히 좋으니까 좋다고 말할 때도 많지만, 크게 공들여 살펴보지 않아서 ‘좋다’고 말해버릴 때도 있어. 대학 다닐 때 교지 편집부 하면서 문장 하나로 세 시간씩 싸우던 때가 그리운 것은 아닌데, 그런 되지도 않는 열렬함 같은 게 또 오긴 올까 싶어.
어제 꿈에는 아구아 비바가 나왔어. 리스펙토르의 『아구아 비바』 책이 나온 것도 아니고, 작가인 리스펙토르의 얼굴이 나온 것도 아니고, 모니터 빈 화면에 볼드체로 큼지막하게 Água Viva 이 글자만 놓여있었어. 최근에 읽은 책이긴 해. 『아구아 비바』 한국어판 편집자 주에서 본 내용인데 아구아 비바는 직역하면 ‘살아있는 물’이고 일반적으로 해파리를 의미한대. 그리고 이 둘은 뼈대가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설명해. 단단한 뼈대가 없으면 많은 것들에 들러붙기 좋잖아. 최근에 자기소개에 ‘열려 있으려고 한다’라고 썼는데 그런 태도가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인가 봐. 누구나 무언가를 특정한 방식으로, 그러니까 자기 쪼대로 포착하고 인지하면서 살아가잖아.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활짝 열린 채로 어떤 것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주리야, 편지를 몇 번 주고받았더니 올해가 훌쩍 지나가 버린 것 같아. 내가 미국에 널 보러 갔을 때가 거의 1년 전이라는 게 믿어져? 또 가서 1년 동안 네가 쌓아온 맛집 리스트를 뽀개고 싶다. 우선 주리가 한국에 오는 게 먼저일 테니, 이번에 한국에 오면 네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잔뜩 하자.
가을을 보내고 곧 만나 주리야.
보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