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보영에게:
착지법
두 번째 편지

주리에게

주리 안녕! 거긴 곧 일요일 아침이겠다. 여긴 일요일 저녁이야. 어제부터 날씨가 좋아. 해가 나고 적절히 따듯하고 동시에 미세먼지도 많지 않은 진짜 몇 안 되는 소중한. 방금 쓰레기 버리고 왔는데 저녁 바람도 좋더라.

망고, 유자 있잖아. 얘들은 내가 쓰레기만 버리고 와도 다시 반가워해 줘. 그럴 때마다 참 좋지. 나도 같이 꾸웳뻽땩 이러면서 반가운 소리를 내. 요즘에도 종종 애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집까지 달려올 때가 있어. 갈수록 점점 더 좋아지는 존재가 있다는 것에 경이로움을 느껴 진짜로… 늘 은은하게 화가 나 있는데 이렇게 생각만 해도 좋은 존재가 있다는 게 기적같이 느껴져.

주리가 그곳에서 외국인으로 사는 게 좋다니 다행이야. 당연히 좋을 수만은 없겠지만 그래도 종합해 봤을 때 '참 좋다' 정도로 간추릴 수 있는 상황이라면 참 좋은 것 같아. 가능한 한 자주, 참 좋다고 느낄 수 있는 일상이길 바라 주리야.

주리가 회고록과 전기에 관한 얘기를 했잖아. 나는 네가 ‘좋아하는 작가의 에세이는 종종 읽었지만, 회고록이나 전기를 읽을 일은 별로 없었다’라고 말한 점이 재밌었어. 주리는 에세이와 회고록/전기를 어떻게 구분 짓는지 궁금하더라. 저번 편지에서 주리가 건넨 질문에 답해보자면 난 20대 중반 정도까진 정치인이나 역사적 인물이라 불리는 사람의 회고록, 자서전, 평전을 많이 읽었어. 내 관심이 거기에 있었으니까 그랬겠지. ‘무엇에 투신해야 하는가’같은, 지금은 거의 하지 않는 종류의 생각을 많이 했거든. 신념에 의해 산 것처럼 보이는 사람의 책에서 답을 구해보려 했었어. 이제는 의심이 많아졌고.

얼마 전에 ‘자전적 소설’이라는 형식에 대한 짧은 글을 썼어. 자전적 소설이라는 말이 갖는 효과를 생각해 보고 싶었거든.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 같은 거였는데 ‘자전적 소설’이라는 분류가 붙은 글 앞에서 독자는 어떤 식으로 읽을 준비를 하는지를 생각하며 썼어. 자전이라는 말과 소설이라는 말 사이에 생기는 긴장이랄지 아니면 오히려 안도랄지 그런 거. 주리가 나한테 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이 문단을 쓰고 있는데, 결론은 내 스스로 내 글에 ‘자서전’이나 ‘회고록’ 같은 분류를 붙여서 내보내진 않을 것 같아. 언제나 내 이야기를 쓰겠지만. 주리가 자서전/회고록 수업을 들으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더 듣고 싶어. 앞으로 무엇을 쓰고 싶은지도.

일요일에는 주리가 늦잠 자길 바라며

보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