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보영에게:
착지법
서문: 올해 편지를 마치며

보영에게

보영아, 이제 여기엔 꼭 나만큼의 무게가 있다.

첫 수업이 끝났어. 에어컨과 와이파이가 되지 않는 교실에서 땀을 몸 안팎으로 흘렸고, 마지막 학생이 나가고 나서야 두 시간 만에 자리에 앉았네. 몸이 무겁고, 그만큼 내가 있는 것 같아. 새삼 착지법을 배우는 중이다.

착지법1. 플라스틱 의자에 드러눕듯 앉아 마루에 발을 대보기. 여기는 뉴욕. 여기는 10층. 여기는 스무 명이 겨우 들어가는 교실. 외국인인 내가 미국인 학생들에게 영작문을 가르쳐야 한다니. “나는 말하는 것보다 쓰는 걸 좋아해, 혹시 나처럼 글쓰기 좋아하는 사람?” 반쯤 거짓인 물음에 열명 남짓의 학생들이 손을 들었어. 오늘 가장 마지막에 나간 학생도 손을 들었나? 모두가 나가기를 기다리던 학생이 있었어. “영어는 제 모국어가 아니란 걸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그 학생이 그랬어. 나는 눈을 크게 뜨며 과장한다. “그러니? 나는 전혀 몰랐네. 하지만 내가 여기서 가르칠 수 있다면, 너도 이 수업 충분히 따라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자 분명 학생이 웃었는데, 멋쩍어서 웃었을까 안심해서 웃었을까.

착지법2. 커다란 이민용 캐리어 두 개를 택시 트렁크에 싣기. 아무렇지 않은 듯 캐리어를 번쩍 들면서 알았어. 여기는 여기였던 적이 없는 여기구나.

착지법3. 나를 빤히 보는 보영의 눈을 바라보기. 그런 눈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어. 그러다 한 번 실수로 피하지 못했지. 어쩔 수 없이 마주친 보영의 눈은 낯설면서도 다정했는데. 내게 디딜 수 있는 바닥을 내어주었는데.

대형 모니터에는 아직 내 강의계획서가 펼쳐져 있다. 빨리 치우고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며 잠시 눈을 감으니 올해 너와 주고받은 편지가 떠오르네. 보영아, 두어 시간 뒤 여기 노을이 지면 너는 거기 아침 수영을 가겠지. 나도 지금이 아침이면 싶고, 물 위를 그저 떠다니고 싶다. 나는 오늘 거짓말을 잘 했어. 말을 잘 못해서 쓸 수밖에 없는 건데 쓰는 걸 좋아한다고 했어. 모르지 않았는데 몰랐다고 했어.

네게 보내는 첫 편지에 내가, 여기서 외국인으로 사는 게 참 좋다고 했지. 네가 그 말을 좋아해 줘서 좋았다. 거짓말이기도 하지만. 누군가 오늘 내게 여전히 외국인으로 사는 게 좋냐고 물어보면 나는 또 그렇다고 대답할 거야. 여기에 내 무게만큼 내줄 수 있는 바닥이 있더라.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네가 내게 내어줬듯. 

나 여기서 많이 바라보다 곧 갈게.
다시 만날 때까지 계속 읽고 쓰고 사랑하고 있으렴. 나도 그럴게. 

보영에게, 
물을 잘 먹던 고양이 망고에게, 
서로를 기척으로만 아는 고양이 유자에게,
친구들에게,

주리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