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영에게
보고 싶은 보영아.
늦어서 미안. 한동안 편지를 쓸 수 없었어. 쓰지 않았어.
컨디션이 나빴어. 나는 컨디션이 나쁘면 거울을 보지 않아. 볼 수 없어. 내게는 편지 쓰는 일도 거울 보는 일이랑 비슷한가 봐. 메모장을 열기까지 한참 걸렸다.
아까 밤 산책을 하면서 쥐와 비누 생각을 했어. 할렘에는 쥐가 참 많고, 얘네는 힘이 세고 노련해. 아까 본 쥐는 엎어진 피자 한 판을 기어코 끌고 가더라. 그 한 판이 쥐구멍에 다 들어가더라. 멍하니 그걸 보며 걷다가 실수로 뭔가를 툭 찼는데 그 역시 쥐였어. 정신이 번쩍. 보영에게 답장할 때가 된 것 같다.
보영이 울산 이야기 재미있어. 혹시 조금 더 해줄 수 있어? 어떤 친구들이었는지, 그들과 함께 만들고자 한 것은 무엇인지, 결국 쥐는 잡았는지...
그동안 나는 학회에도 다녀오고 아카이브 연구도 다녀왔어. 학회는 땅콩이 유명한 버지니아로, 연구는 화창한 캘리포니아로. 캘리는 추웠고, 버지니아에서는 땅콩을 못 봤어. 몰라도 너무 모르고 갔지. 친구에게 버지니아는 뭐가 유명하냐 물었더니 “땅콩?” 해서 ‘어, 버지니아는 땅콩이로구나’ 했고. 캘리는 뉴욕에서 바쁘게 살던 영화 주인공들이 행복하고 느긋한 결말을 맞이하는 곳이길래 그런 줄 알았지. 민소매만 잔뜩 가져갔다가 도착하자마자 맨투맨을 샀다.
여행이 힘들었나 봐. 나도 일주일에 이삼일은 집에서 혼자 보내야 생활 리듬을 유지할 수 있는데 여행 가면 새로운 리듬을 타야 하잖아. 평소에도 뚝딱이는 편인데 여행 가면 박치인 게 숨길 수 없이 드러난다. 눈 둘 곳도 모르고, 누가 봐도 ‘아 여기 처음 온 사람이구나’ 싶게. 하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야. 하루는 일정을 마치고 Y와 느지막이 클럽에 갔어. 샘 스미스의 음악이 흘러나왔고 도착한 순간부터 우리의 승모근은 그 리듬을 알고 있었지. 곧 화려한 왁킹으로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어. 한 시간쯤 지났을까, 우리는 무대 위 봉을 잡고 헐떡이고 있었고, 관객들은 모두 코리아, 코리아를 연신 외쳤어.
아, 이런 편지면 조금 더 쓸 수 있을 것 같아. 보영아 나는 지금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서 실실 웃고 있어. 이곳의 여름도 너무 더운데 지금은 밤이고, 방금 긴 산책을 막 하고 돌아온 참이라 아직 힘이 있나 봐. 뻥칠 힘... 클럽에서 나는 엉망이었지. 리듬이라도 타고 싶은데 발과 엉덩이는 왜 이렇게 무거운지. 두 개나 있는 팔을 어떻게 해야 가눠야 하는 건지. 초조하게 화장실을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두어 시간을 혼자 까닥이다가 돌아왔어. 그것도 힘이 들어서 돌아올 때는 택시를 탔다. 뒷좌석 창문에 기대어 그 클럽이 퍽 재미있었다는 생각을 했어. 그동안 갔던 클럽에는 10대 20대가 대부분이었는데, 샌프란시스코의 그 클럽에는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제각각 춤을 추고 있었어. 나는 진토닉 두 잔에 취했지만 내 옆에서 리듬을 타던 사람들은 춤에 취한 것이 분명해 보였어.
『H마트에서 울다』 는 이번 여름에 조금 읽었어. 아마 다음 학기부터 학부생들 〈영작문〉 가르칠 때 부교재로 일부 사용할 것 같아. 허기나 장소에 대해서 글쓰기를 할 때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것 같아. 허기는 먹고 싶다는 욕망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보고 싶다, 가고 싶다, 죽거나 살고 싶다는 욕망을 일으키기도 하잖아. 미셸 자우너(『H마트에서 울다』의 저자)는 자신의 허기짐을 잘 알고 어루만지는 것 같아. 그 허기는 H마트에 가면 선명해지고, 다른 감정과 기억으로 퍼져나가지. 이런 부분을 학생들과 공유하고 싶어.
한국 트위터에서 ‘계급’에 대한 이야기가 돈 것은 나도 보았어. 사회 계층이동이 점점 더 어려워지다 못해, 이젠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계급이라는 단어를 쓰는 거겠지? 자우너 할머니의 부유함이 화두였던 것으로 기억해. 솔직히 말하자면 트위터에서의 ‘계급’ 이야기 자체는 내게 흥미롭지 않았어. 다만 자우너에게는 허기의 감각을 글로 쓸 수 있는 재능과 여유가 있구나, 그런 생각했어.
요즘 나는 시간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는데, 당연히 사회 계층이나 ‘계급’에 따라서 사는 시간도 달라지겠지? 종종 글쓰기가 사치처럼 느껴지던 때가 있었어. 특히 하루종일 일한 날이면 더. 꾸역꾸역 책상 앞에 앉아보지만 글을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어. 내게만 시간이 빨리 가고 있다는 생각에 더럭 겁이나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늘 말하지만 온실 속의 화초, 어디서든 왕자이자 공주이고 싶은
주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