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영에게
보영이 잘 잤니. 너의 편지가 도착한 날 아침에는 꿈 없이 편안하게 늦잠을 잤어. 그 뒤로 스물 몇 번의 밤이 더 지났네. 그사이 내 밤은 대체로 평안했다. 너의 밤은 어땠는지.
여기는 맑은 날이 이어지고 있어. 그게 왠지 조금 마음에 걸려. 나는 미세먼지 가득한 서울 봄 하늘을 아는데, 이 대도시는 그런 걸 모른 채 봄을 만끽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이 봄에 하나 부족한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비야. 맨해튼에서 대규모 농사를 짓는 사람은 없겠지만, 가까운 곳곳에서 근심 어린 목소리들이 들린다. 일기예보에 분명 비 소식이 있다가도 다음 날이 되면 자꾸 사라져. 다시 또 내일, 또 내일. 내일은 꼭 내리면 좋겠다.
회고록과 자서전을 많이 읽었다니 놀랐어. 이십 대의 나는 서점 매대에서 정치인이나 기업인 얼굴이 크게 박힌 자서전을 보면 모른 체 지나가는 사람이었거든. 혜화 살 때 선거철을 한 번 맞이한 적이 있는데, 정치인들이 색색의 점퍼를 입고 지하철역 앞에서 명함을 돌리거나 악수를 청하면 모른 체 했던 것과 같은 마음으로 말이야. 그렇지만 ‘무엇에 투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아닌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시간을 쏟았던 건 기억이 나. 보영처럼 책에서 한 번 찾아볼걸. 나는 주로 술자리에서, 몇 잔 마시지 않고도 금세 벌게지는 얼굴들 앞에서 답을 찾으려고 용을 썼어. 이제 그런 술자리에는 가지 않고.
너와 나는 더 이상 ‘무엇에 투신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지만. 그런 고민을 한 이유와 더 이상 하지 않게 된 이유는 어쩌면 생각보다 많이 닮아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도, 그리고 지금 어떤 글을 쓰고 있는지도 이 생각과 함께 돌아보려고. 보영은 요즘 어떤 글 써?
보영이 말해준, 그리고 써준 ‘자전적 소설’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 중이야. 이번학기 수업 과제로 자전에 기반을 둔 글들을 많이 써야 했었는데, 사실 항상 뻥을 섞었어. 가끔 뻥 없이는 그 다음 문장을 쓸 수 없어서…
참, 궁금한 게 하나 더 있어. 보영은 외국인으로 살아본 경험이 있어? 한국 밖을 벗어나 산 경험만을 묻는 것은 아니고. 낯선 곳에 새로 정착한 경험이 있는지 궁금해졌어.
기말 공부 싫어서 하루 종일 책 정리한
주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