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보영에게:
착지법
여섯 번째 편지

주리에게


주리 안녕! 여름 잘 나고 있어?

여긴 어제 태풍이 지나갔어. 그전까진 너무 더웠고. 근데 주리야, 지난 편지에서 주리가 왁킹 선보인 이야기 있잖아. 나 처음에 진짠 줄 알았어. 그래서 왜 나한테 그동안 춤 실력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잠시 생각했거든. 뻥이라니...

그나저나 편지 보내는 거 엄청 오랜만인 것 같아. 시간이 훅훅 지나가 버려. 정말 훅훅. 8월 중순이라는 게 약간 띠용하게 되는 그런. ‘분명 얼마 전에 올해 초였는데, 이게 무슨?’ 하고 잠시 멈칫거리는 때가 있어.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자극이 적고, 그렇기 때문에 기억하는 순간들이 적어져서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어디선가 봤던 거 같아. 난 올해 새로운 자극이 많았고 기억나는 순간들도 꽤 많은데 왜 이렇게 시간이 나보다 앞서가는 느낌일까? 시간한테 ‘눈치 챙겨’ 이러고 싶은 마음이야.

얼마 전에 4월부터 들었던 디자인 수업을 수료했다. 출판사를 운영하고 책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디자이너와 소통을 잘할 수 있는 기획자/편집자가 되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건데 좀 흠뻑 빠졌던 것 같아.이제는 그냥 내가 직접 다 해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어. 요즘엔 디자인 관련 일을 하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기도 해. 감사하게도 몇몇 분이 디자인 일을 의뢰해 줘서 그걸 하기도 했고, 최근엔 우리 동네가게들 인테리어 개선 작업에 참여하고 있어. 2023년이 시작될 때만 해도 이런 일상은 전혀 상상하지 않았는데 신기하고 재밌어. 늘 이런 식이지만. 언제 어디서 뭐가 시작될지 모르고, 그 맛에 좀 더 살아봐야겠다 싶네.

지난 편지에서 얘기했던 울산 이야기도 그래. 내가 울산에 가서 노동조합을 만들겠다고 할지 그 전엔 상상조차 못 했었지. 울산에서도 서른두 살의 내가 이런 일들을 해나가고 있을지 상상조차 못했고. 그러니까 재밌는 거 같아. 그때 나온 쥐 있잖아. 사실 쥐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어서 쥐가 나오자마자 세스코에 연락했다? 그다음 날인가, 세스코 직원이 방문해 주셨어. 한 40대쯤 되어 보이는 여성분이 왔는데, 우리가 쥐가 나왔던 곳을 가리키며 그분께 제발 도와달라고 했는데 그분이 잠시 망설이더니 너무 무섭다고, 자기도 쥐는 처음이라고 하시는 거야. 진짜 그분이 호달달달 떠는 게 보였어. 그분은 얼마나 난감했을까? 자기도 쥐를 무서워하는데 일은 해야 하고, 또 나와 동거인들이 그분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무언가 해결해 주길 원했으니.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 그날 이후로 쥐 소동은 없었으니 무언가 해결이 되었던 걸지도.

지금은 토요일 아침인데 수영장에 갔다가 막 스터디카페에 왔어. 요즘 아침 수영을 다니는데 월~금은 수업이 있고 토요일은 자유수영이다? 나는 토요일에는 당연히 사람이 없을 줄 알았어. 토요일 아침 7시에, 수업도 없는데 사람들이 과연 올까? 싶은 마음으로 갔는데 사람들이 거의 다 왔더라구! 진짜 대단해. 하여튼 여름엔 물속에 있는 게 정말 좋아. 아까 수영하면서 나처럼 늘 은은하게 화가 나있는 사람은 물에 들어가 있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 몸에 화도 많고 열도 많고. 내 사주에 불이 많은데, 그래서 그런지 물에 들어가 있으면 좀 진정되는 거 같아. 진짜 불이 꺼지는 거 같거든(?)

요즘 다니는 스터디카페는 너무 쾌적해서 살고 싶을 정도야. 아니 이건 좀 거짓말인 것 같다. 아무튼 정말 쾌적해. 일부러 집에서 걸어가기엔 좀 먼 곳으로 잡았어. 버스 타면 10분이면 오긴 하는데, 걸어 다닐만한 거리면 내가 여차하면 집에 갈 거 같아서. 뭐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할 것 같아. 그 왜 항상 마감이라는 것이 있잖아. 마감 끝나면 좀 숨을 돌릴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정신 차려보면 또 다른 마감이 눈앞에 있고. 그냥 그것이 사는 것이로구나…하고 이젠 좀 진정하고 받아들이려고. 마감이 있어서 스터디카페에 등록했다는 이야기였어. 

이렇게까지 스터디카페가 잘 되어있는 나라가 있을까 싶어. 시설이 무척 깨끗한데 커피 머신에 들어있는 원두도 신선하고 필요한 잡동사니들도 대여해서 쓸 수 있고, 무엇보다 스탠드 조명이 압권이야. 같은 모델을 사고 싶은데 안 팔더라고. 어디서 구할 수 있을지. 아무튼 이렇게 쾌적한 공간에서 사람들이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 무언가를 한다는 게 기이하게 보이기도 해. 다들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이 스터디카페를 이용했던 회원 중 한 명은 영화감독이었나 봐. 자기 영화 개봉했다고 입구에 포스터 붙여놨더라고. 다들 화이팅하시라는 말과 함께. 그러니까 여기서 이런저런 영화 작업을 했던 것 같은데, 지금 함께 앉아있는 사람들이 자기 책상에서 자기만의 어떤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다들 무슨 작업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어떤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지더라고. 그럴 수는 없겠지만. 화장실 오가는 길에 흘끔 쳐다보긴 하는데 다들 뭘 하는지는 잘 모르겠어.

나 요즘 다른 나라 가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해. 다른 나라가 중요한 건 아니고 그냥 여기가 싫다는 마음이 이전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생기는 것 같기도 해. 이전에도 이곳이 썩 좋진 않았지만 그래도 여기서 뭔가 하고 싶다, 혹은 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없는 것 같아.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까, 모르겠어!

이따 점심에 집에 친구가 오기로 했어. 얼마 전에 트위터에서 보고 알배추 볶음면이라는 걸 해봤는데 너무 맛있는 거야. 그래서 오늘 친구에게 그걸 해주려고 해. 약간 술안주 같기도 해서 사케도 샀어.

요즘 술을 거의 마시지 않지만 오늘은 메뉴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믿으며. 만드는 법이 간단해서 주리가 있는 곳에서도 아마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일단 내가 캡처한 화면 같이 보낼게. 궁금하면 한 번 해봐 주리야!


즐거운 주말 보내구.
더운 날 무탈히!

보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