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보영에게:
착지법
첫 번째 편지

보영에게

보영, 안녕. 밥 먹었어? 

나는 방금 먹었어. 어제 학과 행사에서 피자가 많이 남아서 몇 조각 싸왔거든. 전자레인지에 너무 오래 돌려 흐물흐물해진 피자를 젓가락으로 찢어먹다가 룸메이트에게 한소리 들었다. ‘법이 없어도 지켜야 하는 게 있다’고. 안 들리는 척 맛있게 먹었지만, 앞으로 피자 먹을 때 젓가락은 쓰지 않으려고. 설거지가 번거롭더라.

보영아, 나는 외국인으로 사는 게 참 좋다? 아직 뉴욕에 산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아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말도 할 수 있을 때 해볼래.

외국인으로 산다는 건 말야, 음. 일단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일이야. 주리, 라는 이름이 부르기 쉬운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되었어. 잘 해도 줄리. 학기 첫 수업 시간에는 자기소개를 길게 할 수 있으니까 내 이름을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천천히 설명하기도 해. 줄리(Julie)랑 주디(Judy) 그 사이 어디쯤에 있다고. 이렇게 적고 나니까 그렇게 친절한 설명은 아니네. 하지만 몇몇 친구들은 내 리을을 제대로 찾아 불러주기도 해. 그럴 때면 깜짝 놀라. 뭔가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 

줄리로 사는 게 아직은 참 좋다. 왜 좋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여기서 벌어지는 일이 진짜 주리에게, 한국에 언젠간 돌아갈 주리에게, 별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듯해. RPG 게임에 오래 로그인해있는 것만 같아. 줄리는 주리보다 ‘메론맛초코’나 ‘수제비추억’같은 거랑 더 비슷해.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닉네임이지만, 이 이름들을 걸고 사랑했던 이야기들이 생각나. 그 공간에서만 가능했던 이야기들. 지금 나는 여기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들을 찾고 있어. 줄리와 그 주변을 사랑해보기로 작정했어.

보영, 나는 요즘 회고록 및 전기(Biography and Memoir) 프로그램에서 연 수업을 하나 듣고 있어. 이런 프로그램이 있는지도 여기 와서 처음 알았어. 한국에 있을 때 좋아하는 작가의 에세이는 종종 읽었지만 회고록이나 전기를 읽을 일은 별로 없었거든. 보영도 그렇지 않아? 내게 이 장르는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읽으면 천 원씩 준다고 해서 읽었던 세계 위인전집이나, 고등학생 때쯤 서점 가면 깔려있던 모 기업 회장들의 칠전팔기 성공 스토리를 담은 책들 뿐이었어서 말이야.  

내게 전기란 그런 이야기들인데, 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 중 절반 정도는 자신의 회고록이나 전기를 쓰고 있대. 그 얘기를 듣곤 놀랐어.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쓰려는 걸까? 어때, 보영도 언젠가 보영의 회고록을 써보고 싶어? 쓰는 사람인 보영에게 물어본다. 그냥 보고 싶은 마음에 아무 질문이나 던지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보영과 글 얘기할 때 무척 신나거든. 

답장 천천히 해줘. 다른 글도 많이 써주고. 

보영이 보고싶은 
주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