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보영에게:
착지법
일곱 번째 편지

보영에게

보영이 태풍 이후 안녕하니. 

토요일 학교 도서관에 와서 답장을 쓴다. 주말에 도서관 온 거 처음이야. 발등에 떨어진 불을 한참 쳐다보다가 드디어 신발 신고 나왔어. 아 따듯하다.

아직 팔월 중순. 작년 이맘때 여기는 펄펄 끓었는데, 오늘 학교 오는 길은 꼭 추석 같더라. 갑자기 선선해져서 그런가, 오랜만에 김치찌개를 먹어서 그런가. 아까 쓰레기 더미 앞을 지나면서도 추석 같다고 생각했어. 여기 오기 전 오 년 동안 추석 연휴에 늘 학교에 있었는데, 연휴 기간 학교 캠퍼스에는 늘 쓰레기가 쌓여있었거든. 버리는 사람만 있고 치우는 사람은 없어서.

울산 쥐 이야기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뉴욕시에서 ‘쥐잡이’를 대대적으로 모집한다는 메일을 받았어. 도시에 쥐가 너무 많아져서 쥐 떼를 ‘해결’할 사람들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시급이 꽤 세서 잠깐 혹했다. 같이 있던 친구한테, 나 쥐 안 무서운데 지원해 볼까? 했더니 친구가 어이없다는 듯 답했어. “너는 쥐를 바라보기만 하니까 안 무섭지. ‘해결’할 수 있어?” 음. 그런 해결은 무섭다.   

보영이 편지를 읽으면서 익숙한 공간들이 생각났어. 우선 스터디카페. 뉴욕에 오기 전 일 년은 정말 스터디 카페에 오래 있었는데. 내가 다녔던 곳은 혜화 근처였고, 그곳도 무척이나 쾌적한 곳이었어. 새 글을 찾고 싶을 때는 내가 좋아하는 오분 거리 시집 서점에 갔지만, 내 글을 붙들고 있어야 할 때는 스터디카페로 갔어. 커피도 몇 번이나 뽑아 마시면서. 내가 다녔던 곳에도 영화 만드는 사람이 있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 하고 있었는데. 한겨울 새벽,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와작와작 소리에 졸다가 놀라 돌아본 기억이 난다. 누군가 얼음을 씹어먹고 있었는데. 얼굴도 무얼 마시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저 사람 열이 많구나 싶었지. 

나는 몸에 열이 많은지는 모르겠고, 사주에는 불이 꽤 있어. 제일 많은 건 땅이지만 불도 서너개 된다. 땅하고 불이 많으면 고집이 세대. 최근에는 고집을 부려 야외수영장에 다녀왔어. 최근 잔병치레를 하느라 수영 못 한 지 오래되었는데 이러다 또 금방 날이 추워질 것 같아 아득바득 다녀왔다. 지하철 타고 한참 가야하는 곳에 실내 수영장이, 집 근처에는 야외 수영장이 하나 있어. 큰 나무들로 둘러싸인 야외 수영장은 바람이 불면 물 위로 나뭇잎이 떨어져. 가끔 반 바퀴 만에 멈추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떨어지는 잎을 바라보았어. 아, 또 가고 싶다. 

보영아, 나는 아직도 종종 내가 여기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 믿기진 않지만 여기서도 밥해 먹고 친구를 사귀고 가끔 춤도 추고 있다. 나는 화만큼 부끄러움이 많아서 불편한 곳에서는 까딱도 하지 않지만, 좋아하는 사람 앞이라면 지하철에서 봉이라도 잡고 춤을 출 수 있어. 생각해 보니 보영이 뉴욕 왔을 때 같이 춤추러 갔구나. 그땐 내가 육욕에 눈이 멀어 다른 데 정신을 팔았지만, 나 한국 들어가면 다시 한번 같이 춤추자. 나도 알배추 볶음면 해주라. 내가 술 사갈게. 보영의 집에서 음악 틀어놓고 춤춰도 되나. 망고랑 유자가 싫어할까. 만약 보영이 다른 나라에 있다면 그곳으로 갈게. 

여기였던 적이 없는 여기, 맨해튼에서 요즘 내가 하는 상상은 꽤 확고해. 나는 좋은 글을 오래 잘 읽는 사람이 되고 싶다. 몇 년 전부터 이 문장을 내 안에서 계속 굴리고 있는데, ‘좋은 글’은 한때 ‘친구들의 글’이었다가 또 ‘굳이 친구일 필요 없는 선한 사람들의 글’이었다가 요즘은 그냥 좋은 글이 되었어. ‘오래’라는 단어는 최근에 붙이게 되었고. 몸을 자주 식히고 체력을 더 길러야겠다.

언젠간 내가 번역하고 보영이 디자인한 시집을 내고 싶어. 여기에서 좋은 글을 많이 만났어. 무엇을 번역하고 싶은지 아직은 상상만 하고 있지만 또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손에 새 책을 쥐고 있을 것만 같고.

보고 싶어, 조만간 통화하자. 

주리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