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리에게
주리야 주말이다! 이번 주말을 정말 기다렸는데, 주말이야 드디어. 나는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생활을 해야 그나마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는데 몇 주 동안 그러질 못했어. 이번 주말 뒤에 부처님 오신 날까지 3일 동안 휴일인데 3일 동안 집 밖에 나갈 일이 하나도 잡혀있지 않아서 좋아. 중간에 도서관에 가야 하지만 그 정도는 뭐! 주리는 학회에 다녀온 것 같은데 이번 주말이 쉴 수 있는 주말일지, 아니면 밀려있는 일을 처리해야 하는 바쁜 주말일지. 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주리가 지난 편지에서 그곳의 봄 날씨를 이야기했는데 내가 답장할 때가 되니 이제 여름이 코앞이야. 나는 더위를 그렇게 싫어하는 편이 아니고, 많은 사람이 그러는 것처럼 나도 여름밤이면 무턱대고 설레는 편이라 여름이 오는 것도 좋아. 근데 올해는 내가 준비해야 할 일이 많다는 생각이 들고, 그것 때문에 조급한 마음도 들어서 ‘벌써 올해가 반 정도 지나고 있네’ 하면서 다리를 덜덜 떨어. ^.ㅠ
주리가 지난 편지에서 내게 보낸 질문 두 가지, 요즘 쓰고 있는 글과 쓰고 싶은 글이 무엇인지와 외국인으로, 그러니까 낯선 곳에 새로 정착한 경험이 있는지에 대해서 답하고 싶어. 일단 요즘 쓰고 싶은 글을 써본 기억이 없어. 딱히 쓰고 싶은 글이 있지도 않았고. 지원서만 잔뜩 쓰느라 그랬던 것 같아. 그러다 보니 어떤 감각들을 의도적으로 닫아두는 것 같고. 어떻게 빨리 일을 벌이고 자리를 잡을 것인가 말고 별다른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 좋은 일인진 모르겠어. 책도 당장 일에 필요한 것들만 읽었고. 이번 주말엔 조금 다른 걸 해보고 싶은데 과연 할 수 있을지?
그리고 외국인으로서는 아니지만 낯선 곳에 정착한 경험은 여러 번 있는 거 같아. 스무 살 이후에는 한국 안에서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서울에 있을 때는 서울 안에서도 여러 구를 돌아다니면서 지냈거든. 나는 새로운 일, 안 해본 일을 통해 긍정적인 자극을 경험하는 편이어서 계속 옮겨 다녔던 것 같아. 지금은 이 동네에 정붙여서 오래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만 또 모르지. 음. 소개할 만한 경험은 울산에 갔던 거 같아. 노동조합 만들겠다는 이유로 친구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사했었거든. 나는 1년 조금 넘게인지 1년 조금 안 되는 시간인지 헷갈리지만, 그 정도의 시간을 울산에서 지냈어. 울산을 전혀 몰랐는데 무작정 갔어. 그 도시에 적응하는 게 쉽지는 않았어. 그 도시에 마음껏 적응할 생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울산에서 친구들이랑 같이 산 건 진짜 재밌었어. 넷이 함께 살았는데 그중 한 친구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웃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그 친구 덕에 웃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잠들기 전까지 웃을 수 있었어. 정말 아파트 떠나가게 많이 웃었던 것 같다. 재밌는 에피소드를 하나 말하자면 친구들과 같이 살았던 아파트가 아주 오래된 아파트였는데 집 화장실에서 쥐가 나왔어! 쥐가 비누를 먹더라고! 그때 처음 알았어. 쥐가 비누를 좋아한단걸... ‘쥐 비누’라고 검색하면 많은 사례가 나온다는 것도...
요즘엔 ‘트라우마’ 혹은 ‘내밀한’ 글에 대해서 종종 생각하는 거 같아. 얼마 전에 누가 트위터에 올려서 보게 되었는데 대학 입학 과정에서 자기소개서 같은 걸 쓸 때 ‘트라우마 에세이’를 쓰면 더 좋은 평가를 받는 경향과 그에 관한 문제의식을 담은 영상이었어. 며칠 전부터 갑자기 트위터에서 『H마트에서 울다』 책을 조롱하는 몇 트윗을 봤는데 아직 자세히 들여다보진 못했지만, 그 부분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보고 싶더라고. 『H마트에서 울다』 자체를 아직 안 읽어봤는데 지금 한국에서 계급이 뭐고, 계급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읽히고, 계급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뭐고, 그 계급이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싶어. 주리가 혹시 그 책을 읽어봤다면 이 일련의 일에 관해 이야기 해주길 부탁해 봅니다.
여긴 비가 온다. 좋아!
마음껏 늘어질 수 있는 주말 보내길 바라 주리야.
보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