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경화에게:
알면서도 우리는
여덟 번째 편지

주리에게

주리, 청소는 기도 같다는 말이 참 좋아요. 주말이면 가장 넓은 친구네에서 모이곤 했는데 모두 자고 있거나 자리를 비우면 구석구석 쓸고 닦았거든요. 그 시간을 꽤 좋아했어요. 그런 중엔 가스레인지에 검게 말라붙은 양파 조각, 개키다 만 수건, 책장에 붙여둔 편지들, 문고리마다 겹겹 달린 가방들ㅡ꾸려나가는 살림살이의 눅눅한 피로, 그럼에도 번뜩이는 의지들ㅡ, 더 잘 보이지요. 배수구에 낀 음식물을 걷어내고, 쿠션을 탁탁 털어 소파에 올려두면서. 그곳에서 매일 잠들고 요리하고 씻고 바삐 오가는, 늦은 밤이면 같은 내용의 편지를 멀거니 들여다보는 친구의 뒷모습이 어른거리곤 했어요. 그게 고맙고 또 쓸쓸했었지요. 빈집을 나서다가도 더 손을 보탤 것이 없는지 자꾸 돌아보곤 했어요. 그땐 몰랐는데, 기도하는 마음이었나 봐요. 잘하고 있어. 잘 해낼 거고말고. 사랑하고 있어.

친구의 집을 정리하고 있는 주리가 많이 생각나요. 서랍 속 물건의 시야에서 주리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장면으로요. 선명해지지 않는 얼굴을, 계속 봅니다. 지나간 시간을 함께할 순 없겠지만요 주리, 이렇게라도 옆에 있어보려고요.

구월 중순인데 서울은 해가 쨍쨍해요. 눅진한 늦여름의 기운이 남아 있지요. 저는 가을이 오면 기분이 한결 나아지곤 하는데요. 우선 찬바람이 불어오면 온기를 바라게 되는 게 좋아요. 친구들과 둘러앉아 국물 요리가 보글보글 끓는 것을 보고 싶고. 나란히 걷는 사람의 외투를 슬쩍 잡아보고도 싶어지지요. 동시에 온기가 채워지지 않아도 충분한 것이 좋아요. 회색빛의 도시를 춥다, 춥다, 혼잣말하며 걸을 때 외로움이 또렷해지는 것이 좋아요. 낮잠에서 깨었을 때 우리 몸의 감각이 아주 천천하고 부드럽게 돌아오면서 무엇인가 영영 잃었다는 그리움에 사로잡히듯이. 가을은 막막하고 달콤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아요. 가을을 열심히 기다리는 중이랍니다.

미안해요 주리, 여기까지 적고 또 며칠이 지났네요. 나흘 전 장대비가 내리더니 하루아침에 서늘하고 건조한 바람이 붑니다. 8월 말부터 비는 많이 내렸는데, 모두의 기대를 깨고 쭉 고온다습했거든요. 이번 장대비는 진짜 진짜 가을비였던 거지요. 헐거워진 믿음 사이 등장한 가을에 어리둥절한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어요. 이 마른 바람이 벌써 아쉬워서, 팔에 닭살이 돋아도 남방을 걸치고 싶지 않네요.

저는 내일 속초로 늦은 휴가를 가요. 여름휴가는 땀만 뻘뻘 흘리다 오기도 하고, 가을을 만끽하고 싶은 맘에 오래 견뎌봤어요. 예약한 숙소는 침대만 들여놓은 새집처럼 아무것도 없고, 창 너머에는 바다가 보입니다. 늦여름 내내 아무것도 없는 방의 사진을 넘겨보며 끈적한 속을 다독이곤 했는데, 곧 가네요. 그곳에서 사진 보낼게요.

동해는 8년 전 오월에 다녀온 게 마지막이에요. 그때 저와 친구들은 오월이면 따듯해질 거란 순진한 생각으로 강릉 해변에서 밤을 지새우자는 무모한 계획을 세웠지요. 저녁 버스를 타고 밤바다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달리 나는 나뭇가지처럼 각자의 해변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파도는 아주 높고 넓게 헤쳐졌어요. 바다에 바투 다가선 친구가 자칫 쓸려가지 않을까 불안할 만큼이요. 그렇게 한참 외따로 있은 후에, 자정이 넘어서야 가까이 모여 앉았습니다. 주술을 준비하는 마법사들처럼, 실상은 추위로부터의 생존을 위해, 무릎을 대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계속 나누고.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은 왜 그리 많았던 건지. 긴긴밤 동안 소꿉장난하듯 주술 둥지에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해가 돋을 땐 나란히 앉아 그 정경을 지켜보았어요. 낮게 뜬 구름은 짙푸르고, 험상궂었던 밤의 바다는 주황 노랑 초록빛으로 물결쳤지요.

그러고는 초당순두부 식당 앞에 쭈그려 앉아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어요. 머리카락 사이, 귓속과 콧속에 모래가 잔뜩 엉겨 붙은 채 퍼런 입술로, 실없이 웃으면서요. 실은 숙소를 잡으면 더 좋았겠지만, 당시 저희에겐 고속버스 티켓값도 빠듯했거든요. 뜨끈한 아침을 먹으니 모두 몸이 흐물흐물해져서는 돌아가는 버스에 앉자마자 5초 만에 서울에 도착하는 마법을 경험했어요. 너무 웃기고 안쓰러운, 그만큼 애틋한 시절의 한 기억입니다. 

이따금 해변에서 둥글게 붙어 앉은 모습을 전경처럼 그리곤 해요. 줌 아웃을 길게 하면 마치 밤하늘에 별처럼 보이지요. 새벽 모래사장 위에서 나눈 이야기가 잘 기억나진 않아요. 아마 그때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말했던 것 같은데, 어린 시절의 일기장에서 비슷한 생각과 감정을 발견하듯, 그건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하겠지요. 그런 가정은 정말 위안이 되어요.

주리, 오랫동안 사는 데 코가 빠져서 지난 일을 모두 잊은 듯이 지냈었어요. 오직 해야 할 일로만 움직이고 그게 편하다 여기면서요. 그런데 편지를 주고받는 동안 저는 피어오르는 불 앞에 주리와 함께 앉아 있는 기분이었어요. 밀려나 있던 기억을 되불러왔고, 비롯되는 용기는 커다랗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아아, 이제 주리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어쩌죠? 새 모빌의 날개를 손으로 잡고 속삭이는 갤러리 삼아 마음을 보낼까 봐요. 

주리이.
제 텔레파시가 닿길.
경화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