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화,
간밤은 어땠어요? 벌써 여름이네요. 경화의 여름에 좋음이 많으면 좋겠어요.
저는 머리를 댈 수 있는 곳이라면 버스든 시멘트 바닥이든 바로 잠들 수 있다는 특기가 있었지요. 가끔 경화에게 자랑하기도 했고요. 얼마나 피곤하면…, 그때마다 경화는 제게 이렇게 말했던 것 같아요. 요즘은 그 특기를 통 살리지 못하고 있어요. 덜 피곤해서 그런가. 아니면 더워서 그런가. 오늘도 뒤척이기만 하다가 아침을 맞았어요. 편지를 쓰는 지금은 벌써 밤. 사실 잠을 잘 자기 위해서 편지를 쓰고 있어요. 아직 소화하지 못한 오늘의 머리를, 오늘은 쓸어주고 싶어서요.
한국 시각으로 오늘은 제 생일이어요. 생일이라는 단어는 참 요란하지요. 축하, 감사, 선물, 케익, 파티 같은 단어를 데리고 다니니까요. 경화, 모두들 알면서도 사랑을 한다고 했지요. 저에겐 생일이 특히 그런 날입니다. 알면서도 사랑 하는 날. 사랑하는 마음은 그만큼 어렵다고 했지요. 올해 생일은 유독 어려워서 어쩔 줄 모르는 중입니다.
친구의 부고를 들었어요. 아니, 읽었다고 해야 할 것 같아요. 오늘 저녁을 먹기 오 분 전에 학교로부터 이메일을 받았거든요. 영어로 적힌 부고는 식당의 소음과 구별할 수 없었고, 저도 굳이 그 둘을 구별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어요. 벙쪘다기보다는 한 친구에게 N을 소개하는 자리여서, 이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다는 셈을 순간 빠르게 했기 때문이겠지요. 곧 음식이 나왔고, 우리는 그걸 아주 맛있게 먹었어요. 웃고, 떠들었습니다.
N과 집에 오는 길에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을 들렀어요. N이 제게 꼭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서 손을 잡아끌었고, 우리는 평소와 다른 길 위에서 조금 헤맸습니다.
잠깐 여기 서 있어봐, 어느 기둥 앞에 도착했을 때 N이 제게 그렇게 속삭이고는 대각선 반대편 기둥으로 달려갔어요.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는데 벽돌 틈사이로 N의 속삭임이 들렸어요. 사랑해, 사랑해. 벽을 타고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 저도 제 앞의 기둥에 대고 다급하게 소리쳤어요. 나도 사랑해.
알고 보니 이 기둥은 유명한 관광 명소더라고요. “속삭이는 갤러리.” 네 개의 아치형 모서리 중 하나를 바라보고 부드럽게 속삭이면, 그 소리가 천장의 곡선을 따라 벽을 타고 대각선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도 마치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대요. 저는 N의 목소리만큼 함께 전해지는 진동도 좋아서 기둥에 두 손을 대고 한참을 있었습니다.
N에게 제 친구의 부고를 전한 건 몇 정거장쯤 지난 뒤였어요. 지금은, 그때로부터 한 세 시간쯤 떨어져 있지만, 저는 여전히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고요. 잘못된 정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죠? 언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문자도 보내보고 전화도... 이 언니는 저와 같은 기숙사 건물에 잠시 살았는데, 이사하면서 커다란 램프를 제게 남겨주었어요. 꽤 비싼 램프야, 좋은 거야. 유난히 쑥스러워하던 언니의 목소리. 오늘도 그 램프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자마자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램프는 아직 저기 있잖아요? 그렇죠?
어떤 사랑에 대해서는, 지금은 쓸 수 없다는 것을, 이 편지를 쓰면서 깨달아요.
복잡하고 무거운 편지를 읽게 해서 미안해요. 쓰다듬어 달라고 내민 머리,라고 생각해 주면 고맙겠습니다.
주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