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리에게
주리 님, 경화입니다. 편지를 적는 지금 주리의 시간은 새벽 세 시네요. 잘 자고 있을지. 유독 주리에게는 잘 자고 잘 먹길, 자주 말하게 돼요. 단 하나의 소원을 바라야만 가까스로 이뤄질 것 같단 생각해 본 적 있나요? 그런 마음으로요. 주리에게 더는 이와 같은 소원이 필요 없을 날이 와도, 저는 똑같이 바랄 거예요. 주리가 제때 먹고 충분히 잘 수 있길.
유월이면 서점 앞 화단에는 흰나비 한 마리가 찾아들어요. 주리도 본 적이 있을까요? 우리 같이 담배 피우던 곳에요. 멀어질 듯 나풀나풀. 다가올 듯 나풀나풀. 환영처럼 나풀거리는 흰나비를 보는 일은 저에게 다가오는 여름을 맞는 의식이 되었어요. 장마철이 오면 더 볼 수 없는, 흰나비는 올 유월에도 나타났어요. 화단의 나뭇잎 사이를 가볍게 오가는 모습을 보며 문득 누군갈 떠올린 찰나에 나비는 자취를 감추곤 했지요. 분명 눈으로는 그 작은 날갯짓을 쫓고 있던 것 같은데 말이에요.
서울은 집요하게 비가 내려요. 며칠 전엔 낮 동안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는데,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하고 내내 습하기만 했어요. 옆에 있던 친구에게, 모두 집에 돌아가면 이따 한꺼번에 울려고 우우응! 하고 참고 있나 봐. 말했더니, 난 네 흰자가 좋더라. 하더라고요. 제가 비를 꾹 참는 것 같은 하늘을 흉내 내면서 얼굴에 힘을 많이 준 모양이에요. 그래도 좀, 생뚱맞은 대답이지 않아요?
주리는 어떤 날씨를 가장 좋아해요? 저는 천둥번개 치는 게 좋아요. 여행 중에 아주 큰 규모의 천둥번개를 만난 적이 있는데요. 하늘을 여러 갈래로 가르고 땅 꺼질 듯 울던 천둥번개였어요. 인도 동부에 있는 콜카타에 잠시 머무를 때였지요. 새벽에 자고 있는데, 눈꺼풀 위가 환해지더니 쾅 소리가 나 화들짝 깼어요. 바로 샌들을 눌러 신고 밖으로 나가보았죠. ㄷ자 모양의 숙소는 문을 나서면 복도 겸 테라스가 있었고, 높은 건물이 없는 동네라 시야는 트여 있었어요. 그때 보았어요. 눈앞에, 사선을 잇댄 모양의 번개가 길고 선명하게 위에서 아래로 슥 그어지고 또 그어지고, 먼 산골짜기부터 마을의 면면이 푸른빛으로 드러났다가 어둠에 잠기길 반복하는 광경을요. 천둥소리는 얼마나 크던지, 그 진동에 온몸이 흔들리는 것 같았죠. 저는 그대로 거기 서 있었습니다. 빗발치는 빗물에 몸이 젖는 동안. 편안했어요 너무나. 비틀리고 부딪고 발광하는. 쾅쾅대고 쏟아지는. 나타났다 금세 사라지는 것들이 진짜 같아서요.
진짜인지 가짜인지 뭐가 중요할까 싶지만, 그때는 그 감각이 많이 절실했나 봐요. 거울 속 생생해 보이는 나는 가짜. 굴러가는 저만치 세상도 가짜인 것 같아서. 다 가짜 같아서요. 지금도 그때도 '진짜'가 뭘 의미하는지 답을 내진 못하지만, 그 밤이 진짜 같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그리고 여전히 저는 천둥번개가 좋습니다.
새벽에 제가 복도에 나와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어요. 다음 날이 되자 가볍게 흐르는 구름 사이로 깨끗한 햇볕이 내리쬐었고. 그 장면은 꼭 어떤 존재가 쉿, 하고 입술에 검지를 대는 듯이 보였지요... 주리.
편지를 받고 자주 생각했어요, 주리의 친구는 어떤 분이었을지. 짐작될 수 없는 것들을요. 그리고 주리는 어떤지. 걱정하는 마음을 걱정할까봐, 그리고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게 두려워서 이렇게나 가만히 유월과 칠월이 지났습니다. 이 편지에조차 다른 말을 길게 늘어놓고… 저는 그냥 잠깐, 같이 산책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속삭이는 갤러리'를 부러 검색해보지 않고 있어요. 제 상상 속에서 그곳의 모습이, 두 사람이 갈수록 고즈넉해지는 게 좋아서요. N에게 안부를 전해주세요.
무척 보고 싶은 주리에게,
경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