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경화에게:
알면서도 우리는
네 번째 편지

주리에게

주리이, 경화입니다. 바쁘지요? 타지에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분주히 오가고 있을 주리를 생각하면, 걱정이 되면서도 정성껏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실은 봄이 오고 좋음을 통 못 느끼고 있어요. 쉬는 날 카페에 가려고 나섰다가 몇 걸음 못 가 돌아오기 일쑤고요, 꽃이 사방에 흐드러져서는... 그래도. 주리와 지영 님을 화면으로 만난 아침, 우아하게 도로에 떨어져 있던 바나나 껍질, 동료 J가 선물해 준 스콘의 고소함, 비관으로 킬킬거렸던 친구 N과의 새벽 통화, 한 사람의 머리를 쓸어주며 재웠던 밤으로, 긴장이 설렘이 되고 감탄하다 안심하기도 했어요. 주리가 보았다는 상자 속 손톱만 한 태양처럼 잠시 분명하게 맺히는 반짝이 있었지요. 말하자면 엄살이 극에 달한 봄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언뜻 얘기한 적 있지요. 스무 살부터였고 다행히 몇 년 전부터 약을 먹으면서는 잘 자요. 약 없이 자는 게 좋다지만 저는 만족스럽습니다. 그런데 여윈잠을 자던 시기에도 오래 잠든 밤들이 있었어요.

배낭여행을 하면 여러 사람과 한 방을 쓰는 게 익숙하지요.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거니와 낯선 곳에 관한 정보를 얻어야 하니까요. 저는 운 좋게도 숙소에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어요. 도미토리에 아침이 오면 부지런한 사람의 침대엔 이불이 개어져 있고, 전날 늦게까지 술을 마신 사람은 코를 골고, 누군가는 이불을 부스럭거리며 잠에서 깨고 있지요. 혹시 아시나요? 잠에서 깰 때 나는 이불 소리요. 잠든 중에 뒤척이는 소리보다 당당하고, 절도가 있어요. 저 사람 깼구나, 눈치채게 되지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팅팅 부은 얼굴과 딱 마주쳐요. 퐁퐁 웃다가 하아-품. 발 기지개로 이불을 밀어내면서 간밤 잘 잤냐고, 아직 자는 저 친구 어젯밤 대체 몇 시까지 논 거냐며 또 웃고.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친해지며 재밌었지만, 동떨어진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어요. 몸은 여전히 예민하고, 혼자 있을 시간을 만들어내고 그러면서도 외롭고. 사람들의 잠든 숨소리를 구분하게 될 즈음 그곳에 흰이 왔어요. 이름의 마지막 글자가 흰. 흰은 밝은 갈색의 눈동자를 갖고 있었어요. 자꾸 들여다보게 되는, 들여다보고 있으면… 안착한 느낌이 드는. 마침 비어 있던 제 자리 위 이층 침대를 흰이 쓰게 되었죠.

그날 밤도 선잠에 들었다 깨었는데 흰이 방 귀퉁이에 기대앉아 있더라고요. 잠을 잘 못 자요? 그래도 누워 있지요, 말했고 흰은, 앉아서 기다려야 잠이 와요 어서 다시 자요, 하고 말했어요. 깜박, 깜박. 어둠 속에서 깜박, 깜박. 서로의 눈이 깜박, 깜박. 저는 까무룩 잠에 들었고 일어나 보니 정오 무렵이었어요. 붙은 눈으로 비틀거리며 나간 테라스에서 그 애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지요. 어서 다시 자요, 와 같은 나긋함으로 잘 잤어요? 물으며 싱긋 웃던 얼굴.

다른 날 밤 흰은 제 침대맡에 무릎을 두 팔로 안은 채 앉아 있었어요. 말없이 깜박, 깜박… 그때 저는 톡 건드리면 사라질 것 같은 그 애를, 그 애의 눈을 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깜박, 깜박… 명치에 무거운 게 얹어진 듯했는데, 잠이 왔어요. 이상하게도. 잠은 막 쏟아졌어요. 또 다른 밤에 깨었을 땐 제 옆에 웅크린 흰이 잠들어 있었고 편히 자게 해주고 싶었지만 손을 뻗을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제가 깊이 잠든 동안 흰은 또 깨어났겠지요. 아무 손길도 아무 표정도 아무 목소리도 없는 밤에, 기대앉은 갈색의 눈이 감길 듯 말 듯 했겠지요. 흰에게 이리 오라고 불러보고 싶어요. 이제 네가 잠들 때까지 지켜볼 수 있다고. 그러고 싶었다고요.

주리 님, 사랑하는 마음은 참 좋고 그만큼 어려워요. 보통의 사람한테는 무심코 붕어빵을 안겨 줄 수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붕어빵을 주려면 어느 곳이 맛있는지 먹어보고 무슨 맛을 좋아할지 고민하고, 금방 밥을 먹었는지 먹으러 가는지 가늠하다 보면 대뜸, 이게 안 되잖아요. 그러다 결국 속으로 붕어빵, 붕어빵, 생각만 하게 되고요.

근데 저 이제 쓱 주어볼까 해요.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용기 내 묻고 기억하고 움직이고 싶어요. 뒤늦게 갈색 눈동자를 불러보고 싶은 마음으로요.

오월에는 주리가 잘 자면 좋겠어요. 꿈 없이 자며 안심할 수 있기를요.

천천히 알아가고 싶은 주리에게
경화가.

+도로에 떨어져 있던 바나나 껍질 사진을 보내요. 발견했을 때 얼마나 감탄했는지!